임나일본부설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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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나일본부설1-10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문
임나일본부 연구의 필요성
임나일본부의 의미와 말뜻


▶본문
1. 임나의 위치
2. 임나일본부 연구현황
3. 임나일본부 사료의 근거와 비판


▶결론
임나일본부에 관한 요약

본문내용

먼 젓으로 나타나며 또한 광개토대왕릉비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며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칠지도(七支刀)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 강의」서울 한울아카데미 1989 p112~113
일본의 소노까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중인 칠지도의 명문(銘文)이 1873년 소개되었는데 명문속에 ‘供供侯王’의 供이 ‘바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면서 일본서기에 ‘372년 백제사신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 한 자루를 바쳤다’는 기록의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즉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다는 백제 봉헌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명문의 侯王을 제후인 왕으로 해석 하여 동진에서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동진 하사설도 있고, 후왕이 중국사서에서 볼 수 있는 백제의 관직 이름이고 供이 ‘바치다’라는 뜻 외에 ‘주다’라는 의미도 있기에 당시 백제왕의 신하로 간주되던 왜왕에게 준 백제하사설이 가장 유력하다.
(3) 일본서기(日本書紀)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 강의」서울 한울아카데미 1989 p109~110
일본서기 신공 황후 49년 조를 보면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한반도에 건너가 7국과 4읍을 점령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였는데 562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7국과 4읍의 위치를 고증한 결과,지금의 경남경북의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남전북과 충남의 일부를 정복하였으며, 백제왕의 조공을 받으면서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는데 그 중심 기관이 일본부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초 일본의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5세기 이전의 것은 신화적 전설로 간주하는등 그 신빙성에 의문이 많은 책이다. 일본 고대사연구가 혼미 상태인 것도 기록의 신빙성 때문인데 유독 임나 관계 기록만은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것이 우선 문제이다. 그리고 일본서기보다 먼저 기술된 ≪고사기(古事記)≫ 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든지 4세기의 일본은열도조차 통합시키지 못한 상태였기에 해외침략의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측 근거를 믿을수가 없다. 또 ‘일본’이라는 국호도 7세기에 들어와서야 사용되는데 그 이전에 일본부라는 용어가 있었다는것도 시기적으로도 맞지않다.
(4)송서(宋書)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 강의」서울 한울아카데미 1989 p110~112
중국 남북조 시대 남송(南宋:420~479)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에는 5세기에 남송에 조공을 바친 왜의 5왕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무왕(武王)이 스스로 왜백제신라가라(加羅:가야)진한(秦韓)모한(慕韓)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그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募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관직을 수여했다. 이 관직이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면 5세기경의 왜왕은 일본열도는 물론,백제, 신라, 가야까지도 지배한 것이 되고 따라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로 입증된다. 그러나 관직명을 보면 임나와 가라가 모두 가야를 가리키는 것인데 왜 중복되어 나타났는지 또 이미 예전에 멸망한 진한과 마한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무왕(武王)이 받은 관직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허구적인 명예직이었음을 알수 있다. 또한 왜왕이 요구한 7국왕의 관직에서 백제가 제외된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송의 입장에서는 왜왕이 이미 사라진 진한마한의 왕을 칭하든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신라가야의 왕을 칭하든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백제와는 이미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의 왕을 칭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5) 기타 비판
① 약 200년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면 한국 측 기록에 조그만 단서라도 남겨져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임나’라는 지명만이 삼 국사기(三國史記),광개토대왕비,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924)에 보일 뿐이다.
② 왜의 가야지배를 입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이 전혀 없다.
③ 당시 일본열도는 통일 정권이 형성되지 못한 채 여러 소국의 분립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식민지’를 경영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다.
④ 당시 가야는 왜보다 약 반세기 앞선 선진문화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왜의 가야 지배가 가능했을지 의문이 남는다.
⑤ 임나일본부자체가 일본의 우익 역사학자들이 불완전한 근거들을 기초로 만들어 진 학설이기에 전혀 신빙성이 없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임나일본부설이 무엇이고 그동안의 한일 연구동향과 그에 대한 비판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여기서는 앞선 내용의 정리를 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학설에 초점을 두어 자료를 정리했는데, 임나일본부설에 나온 학설로는 출선기관설, 기마민족설, 가야왜인설, 백제군 사령부설, 분국설, 외교사절설 등이 있었다. 각기 여러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내어놓은 학설이지만 문제점도 많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우게 되었던 사료들-광개토대왕릉비문, 일본서기, 송서 왜국전, 칠지도에 관한 내용과 그 비판에 대해 알아보았다. 임나일본부설은 아직 많이 미완성적인 학설이고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때까지의 연구성과에 대해 조그만 비판이라도 해보자면,
임나일본부설에서 가야지방은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연구는 미미하게 이루어지고 도외시되었다. 대신 한일학계에서는 왜와 백제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사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보다는 ‘일본학계의 막연한 선입관과 한국학계의 감정적 반발’이었을 뿐이며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한반도정권당시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 내용에서도 조작이나 날조 등이 많았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아직까지 그 주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많은 연구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학설이 거짓말임을 밝혀야 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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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8
  • 저작시기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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