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마한,진한,변한)특징비교 위치,특징,정치,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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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마한,진한,변한)특징비교 위치,특징,정치,풍속!!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우리에게 있어 단군은 누구인가. 얼마 전 단군 상의 목이 잘려나간 사건이 발생하면서 단군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었다. 단군은 신화적 존재인가 아니면 실존적 인물인가?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본질을 비껴나가 종교간의 마찰로 비춰지기까지 하였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단군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단군에 대한 입장은 남한 보다 북한이 더 적극적임은 잘 알려져 있다. 지난 93년 10월 북한의 조선과학원이 단군릉을 발굴, 단군의 실체를 확인하였다고 발표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이후 북한은 단군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우리 학계의 단군연구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단군의 탄생일로 추정하여 매년 기념하는 개천절이 4대 국경일의 하나임에도 국사 교과서는 단군이 곰의 자식으로 나온다. 단순한 신화적 존재로 묘사돼 있는 것이다. 이는 단군 연구가 역사학계보다는 국문학, 민속학, 신학, 철학, 사상사 분야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돼 왔음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물론 역사학계서 단군 연구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는 실증사학의 전통에 밀려 단군 연구는 학계에서 정식 테마로 인정받지 못한 채 고조선 사회체제를 은유한 신화로 이해되어 왔다.
1)단군조선을 신석기의 고아시아족 시대로 파악하거나 2)고조선을 비교 사학적으로 분석한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정식 성과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단군은 단순한 신화 속의 존재로만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한 단군은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 역사에서 살아 기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역사의 혼돈과 사회변혁의 과정 - 일제강점기와 개화 -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변혁과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우리 민족은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절박한 역사적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공동운명체 의식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라는 인식으로 연결되고, 이제 운명 및 혈연공동체로서의 민족의식은 단군신화에 의하여 비로소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단재 신채호를 선두로 민족사학자들이 단군신화를 재검토하게 되고 대종교에 의하여 단군이 새롭게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우리 민족은 운명·혈연공동체라는 절박한 역사적 의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단군신화 밖에서 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적 상황이 민족주의를 요청하던 것과 똑같은 이유 때문에 13세기에 일연이 삼국유사에 단군신화를 실었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단군신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조에 오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단군 이해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조 사회의 문화적 재통합을 필요로 할 때 일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민족의식이 요청될 때면 단군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곤 하였다. 그 해석은 곧 우리 민족과 그 문화의 정체감에 대한 새로운 자각의 역사적 형태였다.
여기서 "어째서 민족의 위기에 단군신화가 재해석되곤 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갖게 된다. 우리가 가진 단군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오는 신화인데 "신화의 내용을 얼마나 믿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을 대하게 된다. 지금까지 단군에 대한 문제들은 문헌자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상황을 해석하는 역사학과 문헌자료로써 해석하는 국문학적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앞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신화적 신념의 구조와 역사적 기능에 관한 것들, 곧 종교학의 핵심문제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신화 자체로 이해하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기에서는 단군신화의 몇 가지 문제들을 살펴볼 것이다. 단군신화가 각 시대마다 어떻게 해석되어 왔으며, 각각의 신화 해석의 태도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던가를 보기로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단군신화가 우리 역사에 어떻게 살아 기능하였는가를 살펴보고,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본문내용

다.
 단군신화의 후대 형성 여부는 그 본질적 신화 구조 자체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단군신화의 중심축은 하늘신의 아들인 환웅이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세상사를 주관하다 곰이 변해서 된 여인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는 동북아 지역 고대국가의 건국신화 유형으로 널리 분포한다. 특히 한 나라의 시조가 짐승과의 결합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고대적인 관념의 반영으로, 고려시대와 같은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곰을 조상신으로 여기는 토템신앙은 소박한 사회 단계의 족속으로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퉁그스족과 고아시아족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단군신화는 동북아 고대국가들의 건국신화 중에서도 가장 고졸한 모습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고조선이 이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국가라는 점과 연관된다.
단군신화가 고조선 시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그 내용 또한 그대로 사실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완전한 허구도 아니다. 그 속에는 신화가 형성된 시기의 역사적 상황이 투영되어 있고 당시 사람들의 집단적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상황과 사람들의 의식의 일면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점은 단군신화와 같이 오랜 기간 구전되어 오다 훗날 문자로 정착한 경우에는 전승 과정에서 후대의 요소가 첨가된다는 점이다. 가령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해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국가의 형성은 최소한의 객관적 조건으로 농업 경제와 청동기문화가 어느 정도 성숙된 다음에 가능하다.
 그런데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그런 객관적 조건이 마련된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기원전 10세기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오히려 기원전 2333년이란 연대는 중국신화에 전하는 성군으로 문명을 열었다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가 건국되었다는, 즉 우리가 중국 못지 않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단군이 하늘신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났고 천수백 년을 살았다는 것을 황당무계하다고 일축하는 이해방식도 옳지 않다. 그 속에 반영된 당시인들의 관념과 삶의 일면을 시대상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단군신화는 고조선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골격이 형성되고 기능했던 만큼 그 내용도 일차적으로는 고조선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단군신화의 요체는 하늘신이 웅녀와 결합해 낳은 이가 고조선을 건국하고 그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즉 고조선 왕이 정통성과 존엄성의 근저를 신성한 핏줄에서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럴 때 천손인 왕은 자연히 반은 인간, 반은 신인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내세워지게 되며, 단군신화는 이와 같이 고조선 왕실의 신성한 내력을 밝힌 일종의 '본풀이'라고 할 수 있다. 성주 무가(巫歌)의 구조와 단군신화의 그것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지적은 그런 면에서 유의되는 바이다.
 신성한 왕실의 내력을 밝힌 단군신화는 각지의 족장층이 참석한 가운데 신왕의 즉위식과 제의(祭儀) 및 연희를 통해 재현되어 행해졌을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왕의 휘하에서 일정한 통제를 받는 동시에 강한 자치력을 지닌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이 집전하는 제사 의례에 이들 집단의 장들이 참가하는 것은 곧 왕의 권위에 귀속함을 서약한다는 의미였다. 아울러 의례를 행할 때 각지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상호교류와 물자교환 등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와 왕실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의례에 참가함은 주민들간의 정서적 일치감을 함양하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군신화는 일종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정치, 사회적 통합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왕의 정치적 정통성의 근저를 신성한 핏줄에 두었는데, 그것은 곧 천손 관념이었다. 중세사회에 들어서 정통성의 기반을 민(民)의 지지 여부에 두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천손 관념을 대치, 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당위가 되고 이는 유교적 민본정치 이념으로 구체화되었다.
 단 여기서 민은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피치자였으며 정치의 주권자는 왕과 사대부였다.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정치이념과 체제는 근대사회에 들어와서 구현된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의 문제에 관한 구체적 해결방안을 단군신화에서 찾아내려는 시도가 무의미함을 말해 준다.
 
오늘날 단군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고조선의 역사를 전하는 측면 못지 않게 각 시기마다 우리의 선인들이 단군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우리의식'을 심화해 왔다는 사실에도 있다. 예컨대 고려 중기까지도 사람들의 의식 밑바탕에는 '고구려계', '신라계', '백제계' 식의 삼국유민 의식의 잔재가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고양된 민족의식으로 그러한 잔재를 청산하였고, 이는 단군에 대한 인식을 통해 표방되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 국의 군장들은 단군의 자손이다'라고 한 것도 그런 일면이다.
 단군에 대한 인식이 또 한 차례 크게 고양된 시기는 근대로서, '몇 천만 단군의 자손', '한 핏줄', '한겨레', '배달자손' 등의 의식이 그것이다. 민족 구성원 전체가 대등한 자격을 지닌 단군의 자손이라는 인식은 민족적 결속과 독자성의 강조인 동시에 새로운 민족공동체에 대한 열망이었다.
 단군신화가 우리에게 고조선사의 자료를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계속 가지려면 단군에 대한 우리 선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단지 결속력 구축을 위한 신비적이고 추상적인 상징으로 활용한다면 단군신화는 역사의 진전에 무의미하게 될 뿐이다.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역사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맥락으로든 간에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신화가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아무튼 단군신화는 한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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