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우상 레이건 대통령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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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의 우상 레이건 대통령의 일대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미국인의 한때 ’우상’이었던 로널드 레이건,그가 93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01년 대통령 취임시 “나도 레이건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미국에서는 인기있는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제40대 레이건 전 대통령이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급부상한 것은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 지지연설을 한게 계기가 됐다.
당시는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케네디의 ‘뉴 프런티어’에 대한 향수와 케네디를 이었던 린든 존슨 현직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에 대한 열정이 미국 사회를 휩쓸던 시기.
존슨 대통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공화당은 대선 참패의 여파로 지리멸렬한 상황에서도 레이건만은 당시 ‘타임’지가 ‘음울한 선거운동 가운데 한줄기 밝은 빛’이라고 묘사한 이 연설 덕분에 보수주의의 지도적 인물로 확고히 자리를 굳히는 성공을 거뒀다.
레이건의 일생이 영화배우, 주지사, 대통령이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화려했던 것만은 아니다.
1911년 2월6일 일리노이주 탐피코에서 존 레이건과 넬 레이건 사이 두 아들중 둘째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은 빈곤과 아버지의 음주벽, 마음씨 착하지만 지병에 시달린 어머니 등으로 불행한 편이었다.
레이건은 나중에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우리가 맨 밑바닥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너무나 가까이 가 있었기에 위험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정말 크게 들렸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어린 레이건은 항상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자신을 둘러싼 냉혹한 현실에 굴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나중에 그의 힘의 원천이 됐다.
이에는 그의 어머니가 큰 힘이 됐다. 레이건의 어머니는 어린 레이건에게 인간의 본질적 선(善)에 대한 믿음과 신앙심의 중요성을 심어줬다. 레이건은 특히 디사이플 교회의 엄격한 금주 교리에 끌려, 이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10대가 되기전에 이미 대중의 지리를 이끌어내는 연설 솜씨를 갖추게 됐다.
레이건의 무대 사랑과 영웅주의는 어린 시절부터 나타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연극에 참여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드라마를 공부하고 여러 편의 학교 연극에서 호평을 받았다. 유레카 대학에 진학해선 특히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영웅 교훈담 드라마에 끌렸다. 레이건의 세계관에서 영웅은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였다.
레이건이 10대 때 여름이면 록 강변에서 인명구조원 역할을 한 것도 무대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그의 성향과 무관치 않다. 비쩍 마르고 큰 키에 검게 그을린 레이건은 1927년부터 1932년 사이에 구조탑을 지키며 77명을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대학 졸업후 아이오와 데이븐포트 WOC 라디오 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취직한 레이건은 디 모인의 WHO 방송으로 옮긴 후 시카고 컵스팀의 야구경기를 전신으로 시시각각 전해주던 전문만 보면서 ‘실황’ 중계를 해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재능에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였다.
1937년 야구팀의 춘계 훈련장 취재를 위해 캘리포니아에 갔던 레이건은 워너 브라더스사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고 할리우드 영화에 첫 출연하게 된다. ‘사랑은 전파를 타고’라는 영화에서 아나운서 역을 맡았으니 준비된 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건은 주로 B급 영화에 출연했지만 50여편의 자신의 영화가운데 앙심을 품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다리를 절단당한 왕이 “나의 나머지는 어디있느냐”고 외치는 장면이 담겨있는 1941년작 ‘왕의 노호’라는 영화를 최고작으로 꼽았었다. 나중에 그의 자서전 제목이 되기도 한 이 대사는 은막을 넘어서는 레이건의 야망을 말해준 셈이다.
레이건은 뉴딜 정책 시대에 성장했으나 40,50년대를 거치며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사회 침투’에 대한 우려속에서 보수주의자로 변신해갔으며, 1947년엔 하원의 ‘비미국적 활동 위원회’에서 “공산당을 연상시키는 전술을 추종하는” 할리우드 내부 파벌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그해 영화배우조합 위원장으로 선출된 레이건은 노조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동시에 영화산업계에 대한 공산주의의 침투 방지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그러나그가 이같이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사이에 그의 정치활동에 대해 첫번째 부인인 제인 와이먼과 뜻이 맞지 않아 9년간의 결혼이 파경을 맞기도 했다.
결혼 실패와 할리우드에서 돌아오는 배역에 실망한 그는 영화계 바깥에서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이에는 1952년 결혼한 두번째 부인인 낸시 데이비스의 응원이 힘이 됐다.
레이건은 1954년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주말 TV 프로그램 사회자 자리를 얻어 종업원들의 의견을 듣고 사기를 높이는 일을 위해 전국의 GE 지사와 공장 등을찾아 다니다 납세자의 ‘과중한’ 세금부담과 기업에 대한 과도한 정부 규제에 눈을뜨게 됐다. GE사 전국 탐방이 레이건에게 대중연설가로서, 그리고 보수주의 대변인으로서 재능을 연마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64년 연설에서 ‘큰 정부’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장애라고 가차없이 공격한 레이건은 2년뒤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 경선에 이어 본선에서도 정치 신인이면서도 관록의 정치인들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본문내용

를 말한 지 불과 4년만에 레이건 팀은 “미국이 돌아왔다”고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건 진영 내부에선 레이건에 대한 엄격한 검증이 이뤄질 경우 레이건의 결단력있는 지도자 이미지가 무너질 수 있다고 보고 그해 7월부터 11월 사이엔공식 기자회견을 전혀 갖지 않고, 기자들이 큰 소리로 질문해도 헬리콥터 엔진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도록 레이건과 기자들을 철저히 떼놓는 등 주도면밀한 재선전략을짜서 실행했다.
레이건은 민주당 먼데일 대선 후보와 첫 TV 토론회에서 세부 정책 식견을 갖고 경쟁하려다 참패한 후 부인 낸시 여사의 “레이건은 레이건 다와야 한다”는 처방에따라 2차 토론회에선 선전했다. 특히 “내 경쟁자의 젊음과 미숙을 정치적 목적에 악용하지 않겠다”는 말로 자칫 최대 악재가 될 뻔 했던 자신의 약점(73세)을 일거에 뒤집어 버리고 미 대선 사상 최대의 표차로 압승했다.
그러나 2번째 임기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리된’ 행정수반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주지사 8년과 대통령 8년동안 자신을 정치인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어쩌다 나라 일이 맡겨진 일개 시민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건은 자신이 ‘위대한 전달자’로 불리는 데 대해 “내가 위대한 전달자였던게 아니라 위대한 것들을 (국민에게) 전달했던 것”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끊임없이 고취시킨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기를 마치면서 미국민에게 “나는 이제 내 인생의 황혼으로 여행을 시작합니다”고 고별사를 했던 레이건은 이제 그 여행을 마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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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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