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민속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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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의 민속신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우리나라 민속신앙은 오랜 시간을 거슬러 내려오며 하나의 문화로 발전한 민속의 형태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미신의 범주를 지나 정착화된 민속문화이다


천신(天神)
하늘을 모시는 신으로 제일 높은 위치에 있으며 부족국가 시대에는 천신에게 제를 지낼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 과 부족장 뿐이었다
이러한 유래는 중국에서 왕 즉, 하늘의 아들이라 하여 천자(天子) 즉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같은 칭호를 사용할수 없도록 하여 하늘에 대한 제사 또한 조선 시대 에는 지낼수가 없었다.
그 뒤 조선의 고종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원고단을 만들어놓고 천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시 일제강점기에 민속문화 말살정책 으로 사라졌다가 근래에 와서 유
림이나 성균관에서 주관하여 다시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산신(山神)
하늘신 다음으로 일반인 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 으로 큰 산을 중심으로 숭배의 대상을 나누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아래쪽에 살고있는 주민들이 동제의 성격으로 산신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다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경기도,충청도,강원도 에서 산신당을 건립하고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는 풍습이 많았으며 지역에 따라서 특정한 나무를 대표로 지정하여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특히 산신의 경우 사람들이 매일 같이 친숙하게 접하는 것이 아니어서 아버지의 성격이 강한 신이며 특정한 시기에만 찾아가는 것으로 주민들의 안녕을 빌어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민간신앙 과 밀접하게 친숙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신앙이다
특히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에 산을 중심으로 사찰을 건립하면서 산신각을 짓고 호랑이와 노인을 대표적인 산신으로 봉안하여 모셔지는 것이 민간신앙과 제일 밀접한 사례이다.
그러나 대관령 산신의 경우처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서낭당
우리는 흔히 성황신(성황당) 과 서낭신(서낭당)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나 성황신은
중국에서 성(성주)를 돌봐주는 신을 이르는 표현으로 잘못된 표현이며 우리가 부르는 명칭은 [선왕신]으로 부르는 것이 옳은 것으로 이러한 연유는 한자가 중국으로 부터 전래되면서 선왕신의 발음이 서낭 으로 구전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서낭당 또는 서낭신 으로 부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라 하겠다


서낭당집의 모습

지금은 도시화 와 자동차의 생활문화가 발달되면서 1970년대 부터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의 진입로를 확장하고 포장하면서 꼬불 꼬불하던 시골길이 반듯하게 선형이 잡히고 비포장 도로가 없어지면서 마을입구의 정겹던 서낭당이 많이 없어져 버렸다
시골길 비포장 길을 걸어서 마을입구 까지 도착하면 서낭당 나무 그늘에서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돌려 쉬어가면서 찾아가고 있는 집과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걱정과 안부를 미리 점쳐보는 정이 담겨진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우리나라의 서낭당에는 마을 입구의 보호수 아래 서낭당을 짓고 주위를 다섯 색갈로 구분된 천 조각를 둘러쳐 표시하고 있었지만 점차 퇴색하면서 서낭당 고사를 지낼 때 만들어진 금줄(성역표시)이라 하는 왼쪽으로 꼬아서 만든 새끼줄에 흰 조각을 넣어서 만든 것을 주위에 둘러쳤다
그리고 주변에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두가 일률적으로 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돌무더기가 없는 서낭당 도 흔하게 존재하였다

특히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서낭당은 제천시 봉양면 명도2리의 매골 에는 서낭당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위치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인근 마을 되비골(道斐洞)은 제천을 나제(奈提) 또는 내토(奈吐)라고 불리우던 시기였던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제천시 봉양리 와 장평리를 포함한 일원이 모두 나제군의 소재지 였던 지역으로 지금의 군청 소재지가 있었던 지역이다.
특히 되비골로 불리는 곳에는 군수의 관사가 있었으며 명도리 요골에는 양곡창고가 있었고 장성배기 마을과 학고개 에는 경비실이 있었다 하며, 말을 매어놓았던 마장(馬場)이 있었던 장소라고 전해져 온다
매화나무가 많아서 매화동(梅花洞)이라 불리우는 이 마을은 일명 매골이라 하며 명암저수지 아래쪽 우측 골짜기를 대략 2km 정도 올라서면 지금도 정월 보름날에 서낭제를 올리는 서낭을 볼수있으며 보존되고 있는 서낭목 과 서낭당집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서낭당의 발생배경
서낭당은 우리나라에서만 존재했던 민속신앙의 하나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 와 흡사한 서낭의 풍속은 만주, 몽골, 등의 시베리아 와 중앙아시아 를 비롯하여 인디언의 마을에서도 볼수 있었던 마을수호를 위한 하나의 경계표시 로 오랫동안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성역이다
우리나라의 서낭당은 삼국시대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이미 서낭당이 마을의 수호신 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문헌상의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 와 백제의 싸움 이야기 에서 비롯된다
백제 본기 에 의하면 백제왕이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여 [수곡성] 이라는 곳까지 따라가 어느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돌 무더기를 쌓고 왕이 말하기를 [ 누가 후에 이곳까지 또 추격해 올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 것 으로 보아 고구려 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고 돌 무더기를 경계로 표시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흔히 볼수 있는 돌은 쉽게 모을수 있으며 또한 어느것 보다 보존성이 강하고 쌓는 방법도 어렵지 않아 누구나 하나씩 올려 놓으면 돌무더기가 되는것이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서낭을 경계로 하여 마을의 안쪽과 밖같쪽의 경계인 동시 하나의 성역으로 금기시 되기 까지 발전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것이다

본문내용

대청마루에 있는 성주단자에 모셔져 있는 집안 신
터주신 : 땅신, 이라 하는 신으로 한자리에 오랫동안 사는 사람을 터줏대감이라 하는 것에서 유래
삼신: 아이의 잉태에서 탄생과 성장을 관장하는 신
칠성신 : 사람의 목숨을 관장 하는신 으로 안방에 모셨다
오방신 : 마당에서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신
조앙신 :
부엌신 이라 부르기도 하는 조왕신은 물과 불을 관장 하는 신으로섣달 그믐날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 에게 부엌 에서 일어난 1년동안의 모든일은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신이다.
조왕신이 올라갈때는 아궁이 에서 나와 부뚜막을 이용하여 오르는데 이때에 부뚜막 위에 엿을 붙여 놓으면 조왕신이 엿을 먹는 동안 많은 시간을 뺏겨 허겁 지겁 하늘에 올라간 뒤 입이 붙어버려 말을 하지 못하고 거냥 내려온다 는 설화가 전해지면서 우리의 속담에도 집에 빨리 가려는 사람을 보고 [부뚜막에 엿 붙여 놓았나] 라는 말을 한다
측신 :
지금의 화장실은 모두 같은 건물안에 두었지만옛날에는 변소 라 하여 안채의 건물과 떨어진 곳에 별도로 지었던 것은 재래식 화장실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야 불결한 냄새와 청결을 유지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소신을 정랑각시 라 하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장실에 살고있는 처녀신 때문에 화장실을 들어가기 전헛기침이나 노크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연유는 화장실에 살고있는 정랑각시 가 하루 종일 머리카락만 세고 있는데 노크를 하지않고 들어가면 놀라서 세고 있던 머리카락의 숫자를 잊어버려 노여움을 사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을 빠트리거나 신발을 떨어뜨리게 하여 인간을 괴롭힌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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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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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9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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