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의 교파별 특성과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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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교회의 교파별 특성과 유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장로교 (長老敎 Presbyterian)
2. 감리회 (監理會 Methodist Church)
3. 침례교 (浸禮敎 Baptists)
4. 성결교 (聖潔敎 Holiness Church)
5. 루터교
6. 성공회 (聖公會 The Anglican Domain)
7. 구세군 (救世軍 Salvation Army)
9.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기하성), 순복음
10. 기독교 교파들
11. 가톨릭교회의 역사
12. 가톨릭교회의 교의와 전례
13. 가톨릭교회의 조직
14. 한국의 가톨릭

본문내용

사상 한국 교회만의 특징이다. 그러나 한국의 가톨릭은 수용 직후부터 조정(朝廷)의 탄압 대상이 되어 교회 창설 이듬해인 1785년부터 한국-프랑스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된 1887년까지 1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1785년에는 1784년에 창설한 조선교회가 발각되어 김범우가 유배당하였고, 1791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에도 굽히지 않고 베이징교회뿐만 아니라 로마교황에게까지 거듭 편지를 보내어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창설 11주년이 되던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처음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밀입국을 신고한 자가 있어 피신해야만 하였고 관헌의 수색 때문에 사목활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1801년 순조 즉위 뒤부터는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득세한 노론벽파(老論僻派)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이로 인해 주문모와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하고 성서도 대부분 압수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비참한 상황에서도 신도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10년 만에 재기하였고 다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1831년 9월 베이징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초대교구장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B. 브뤼기에르를 임명하였으나 그는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은 토착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최양업(崔良業)·최(崔)프란체스코·김대건(金大建) 등을 마카오로 유학하게 하였다. 1837년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주교 L.M.J. 앵베르가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가톨릭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1839년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기해박해(己亥迫害)이다. 이로 인해 당시 입국해 있던 3명의 선교사와 유진길(劉進吉)·정하상(丁夏祥) 등이 순교하였다. 특히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측하고 미리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제출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하여 가톨릭에 대한 박해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 1845년 마카오로 유학했던 김대건이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어 귀국하여 교우의 수가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으나 1846년 그의 체포를 발단으로 병오박해(丙午迫害)가 일어나 김대건과 교우 9명이 순교하였다. 철종 때에 이르러 가톨릭은 조정의 탄압이 완화되어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베르뇌신부를 비롯한 10여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최양업도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고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전교중이던 선교사 12명 중 9명과 교회의 지도급 신도들이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 중 리델신부는 탈출에 성공, 톈진[天津(천진)]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초래하였다. 병인양요와 1868년 E.J. 오페르트에 의한 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등을 계기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의 박해는 그 규모나 기간 등에 있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로 이 기간 동안 8000~2만여 명의 신도가 처형당하였다.
1886년 한국-프랑스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가톨릭은 불완전하나마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되어 종현성당(鐘峴聖堂;현재의 명동성당)·약현(藥峴)성당 등의 건축, 용산신학교의 개설 등이 이루어졌다. 개화기에는 《경향잡지》 《경향신문》의 창간을 비롯하여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신사참배 등의 강요, 미국인 선교사 추방, 외국인 선교사 구금 등의 종교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발전을 계속하여 여러 교구가 창설되었고 서울교구장직이 노기남(盧基南) 신부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이 탄생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와 함께 우대를 받으며 교세를 더욱 확장하였고, 6·25로 인한 성당·학교 등의 파괴, 성직자·수도자 납치 등의 시련 속에서도 발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한국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자립교회로 승격함으로써 많은 교구가 증설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어 한국교회의 발전과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8년에는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중 24위를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諡福式)이 로마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거행되었고, 1969년 서울대교구의 김수환(金壽煥)교구장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을 맞이하였고, 1984년에는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순교자 103인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였다. 1989년에는 10월 4~8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2002년 한국 천주교회는 420여 만여 명의 신자가 있으며 교구수는 서울·대구·광주 3개의 대교구를 포함하여 14개 교구이다. 본당은 765개, 공소(公所)는 1578개이고, 성직자는 대주교 3명(한국인), 주교 14명(외국인 3명 포함), 한국인 신부 1298명, 외국인 219명, 수도자는 수사(修士)가 한국인 288명, 외국인 32명이고, 수녀는 한국인 4869명, 외국인 198명이다. 또한 천주교유지재단에서 경영하는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26개교, 고등학교 35개교, 대학교 9개교가 있으며, 그 밖에 농아학교, 정신장애자학교 등 특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의료사업으로 성모병원 등 30개소의 병원을 경영하며, 사회사업으로 양로원·나환자정착마을·결핵요양원·부랑인의 집 등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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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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