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에 건국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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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 백제, 신라에 건국신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고구려 건국 신화
2. 신라 건국신화
3. 백제 건국신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 기둥을 가만히 보니 소나 무였고 일곱 모서리로 되어 있었다. 또 일곱 모가 난 주춧돌이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란 일곱 모가 난 기둥과 주춧돌이고 돌 위 소나무란 기둥이 아닐 까?' 정신이 번쩍 든 유리가 기둥을 살펴보니 과연 기둥에 구멍이 있었다. 조심조심 손을 넣어 보니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부러진 칼 한 조각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유리는 크게 기뻐하며 곧 행장을 차려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드디어 고구려에 도착한 유리는 왕에게 나아가 가지고 온 것을 공손히 받들어 올렸다. 주 몽왕이 가지고 있던 칼 한 조각을 꺼내 유리가 바친 것과 맞추어 보니, 칼에서 피가 나면서 하나로 이어져 온전한 칼이 되었다. 주몽은 유리가 자신의 자식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남으로 내려간 비류와 온조 비류와 온조 형제는 부여에서 나타난 유리가 태자가 되자 자신들이 유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고구려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신하들 가운데서도 오간, 마려 등 열 명이 이들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이들이 함 께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나자 많은 백성들도 뒤를 따랐다. 마침내 한산 땅에 이른 이들 일행은 부아악(지금 서울의 북한산)에 올라가 자리잡고 살 만 한 곳을 두루 살펴보았다. 비류는 서쪽으로 보이는 바닷가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그를 말리 며 간하였다. "여기서 살펴보니 이 한수(한강) 남쪽 땅은 북쪽에 강이 있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감싸고 있습니다. 또 남으로 기름진 들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처럼 살기 좋은 곳은 얻기 어려울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서쪽 미추홀(인 천)로 갔다. 온조는 그 땅에 도읍을 정하여 하남 위례성이라 하고 열 명의 신하들의 도움으 로 나라를 세워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런데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다. 결국 다 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벌써 도읍이 자리가 잡혔고 백성들도 별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으 며 살고 있었다. 비류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다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비류를 따랐 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백성들이 많아지고 나라의 세력도 커지자 이름을 백제(百 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 조상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부여 (扶餘)씨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서영대, “한국 고대 신화 연구의 문제점”, 동양사학회, 2005
조동일, 제3판『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1994
이복규, 『부여고구려 건국신화 연구』, 집문당, 1998
이복규 『부여건국신화와 고구려건국신화의 관계』
이지영, 『한국 건국신화의 실상과 이해』, 월인, 2000
장덕순 외, 『구비문학개설』, 일조각, 1978
이종욱『(한국사의 1막1장)건국신화』, 휴머니스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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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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