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혁명 [청교도 혁명, 영국 시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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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혁명 [청교도 혁명, 영국 시민 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위해서는 토리는 왕의 절대적 권위와 신이 부여한 혈통에 의한 계승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 사상가가 로버트 필머인데,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의회는 왕의 자문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휘그는 자유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였다. 휘그 이론가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존 로크이다. 그가 ‘시민정부론’에서 주장한 사회계약론은 명예혁명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민주주의 헌법 사상의 반석이 되었다.
명예혁명이 헌법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와 같지만, 명예혁명은 오늘날과 같은 전면적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즉 의회가 오늘날 국민의 대표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 당시 영국의 의회는 영국 국민 중 소수 귀족 특히 지주층 중심으로 한 가진 자의 대표기관이었음은 명백하다(국가의 통치는 17세기 말에 이르면 5,000명 정도의 지주층인 젠트리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명예혁명을 폄하하는 입장에서는 혁명이라기보다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 사이의 쿠데타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예혁명으로 영국에서 절대왕정이 성립하지 못하고, 이후 의회를 중심으로 한 국정이 운영되었으며, 의회 자체도 소수 귀족의 의회가 아니라 국민의 의회로 진보해나감으로써 오늘날 민주주의 헌법사의 큰 획을 그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3. 5. 명예혁명은 진정 민중들에게도 명예로웠는가?
18세기 초반의 영국은 이제 산업혁명이 폭발적 분출을 눈앞에 두고 사회 도처에서 변화의 조짐이 꿈틀대던 시기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주동하는 힘은 이미 상공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신흥계층들로부터 나오고 있었고 자연히 전통적 기득권자들은 그들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려고 했다. 종교적으로 보면 신흥상공업자들은 종교개혁의 세례를 받아 이른바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고 있었고, 구세력은 주로 전통적인 지주층으로 처음에는 카톨릭을 옹호했으나 국왕과 결탁하면서 영국 국교회를 지지해 왔다. 신흥세력은 의회를 세력기반으로 삼아 사사건건 국왕의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 이 두 파의 파쟁은 급기야 1642년부터 1648년까지 피비린내 나는 내란을 초래하게 된다. 의회파는 크롬웰이라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솔력에 힘입어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다. 이러한 정국변동을 통해 영국 정계는 영국 국교회를 지지하며 지주층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파가 토리당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며 의회정치를 주장하는 신흥세력이 휘그당으로 양분되었다.
한편 크롬웰의 내란 이후 국왕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어리석게도 영국 상황에서는 시대착오적인 가톨릭을 복구시키려고 시도했다가 양파로부터 공격당하는 처치에 몰리고 만다. 이렇게 해서 제임스 2세는 쫓겨나고 양 파는 네덜란드에서 윌리엄을 초빙하여 자기들 말을 잘 듣는 왕으로 옹립한다. 이것 이 1688년의 명예혁명이다. 의회에서 다수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휘그당은 다시는 국왕의 독재가 불가능하도록 문서로서 "국왕은 법의 집행을 정지시키지 못하며, 의회의 동의 없는 조세 징수는 안 된다."는 <권리장전>을 발표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의회의 입법권, 의원의 면책특권, 언론의 자유 등이 모두 이때 영국의 의회가 국왕과의 투쟁 속에서 만들어 낸 것들이다. 그러나 휘그당이 주도하는 정치개혁은 국민일반의 이해를 대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신흥 상공업자들은 이미 경제적으로는 지배층의 지위에 오른 자들로 오로지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국왕의 임의적인 세금징수를 가장 크게 문제 삼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돈 많은 자신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 쫓겨난 몰락 농민들, 도시의 하층민들의 눈으로 보면 휘그당이나 토리당이나 다 가진 자들의 정파이고 서로 자기 몫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 불과했다. 구두굽 높이 2mm의 차이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4. 결론, 영국혁명의 의의
영국혁명의 배경과 결과로부터 우리는 영국혁명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중대한 진전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영국혁명을 통해 지식인들, 특히 정치가들의 가치관이 크게 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인문주의의 기사도, 그리고 옛것을 숭상하는 태도들이 퇴조하고 실용주의와 개인주의 시대가 막을 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식인들의 사고는 더욱더 합리적으로 되었고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적으로 인정하는 경향도 생겼다. “모든 사람은 어떤 다른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서, 자기가 알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재산과 인신을 처분할 완벽한 자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는 로크의 견해는 영국혁명을 통한 새로운 사조와 경향을 잘 나타내고 있고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성취하고자 한 근대인들의 도덕적 특성을 새로이 규정하고 있다.
영국혁명을 통해 확립된 또 하나의 민주적 원리는 입헌주의의 정착이다. 입헌주의는 1215년의 마그나카르타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원리가 완전한 하나의 정치 원리로 수립된 것은 1689년의 권리장전의 선언과 승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권리장전의 선포는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한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입헌주의 원리를 확립시켰다. 이 입헌주의 원리는 절대 권력을 제한하고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보장책이 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입헌주의는 곧이어 삼권분립론과 권력간 견제와 균형의 논리에 의해 보완되어 근대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굳건한 원칙이 되었다.
참고문헌 :
혁명의 탄생 : 근대 유럽을 만든 좌우익 혁명들, 박윤덕 옮김 (교양인)
영국혁명의 꿈과 현실, 김민제 저 (역민사)
유럽대륙을 품은 섬나라 이야기 영국사, 김현수 저 (청아출판사)
영국혁명과 종교적 급진사상, 임희완 저 (새누리)
권리장전(1689년), 명예혁명|작성자 김명주
http://www.kyoyon.co.kr/year/7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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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2.11
  • 저작시기2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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