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임진왜란을 통해 본 역사 속의 동아시아
본 자료는 1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해당 자료는 1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역사학] 임진왜란을 통해 본 역사 속의 동아시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근절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일본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가 남긴 기행문『老松堂日本行錄』은 일본과 일본인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저술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동사록(東錄)』이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일본을 주로 명분적인 차원에서 관찰, 평가했던 것과는 다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1471)는 일본인들이 ‘세계 최초의 일본 연구서’라고 평가한다. ‘해동’은 일본을 가리키고, 제국은 오우치씨(大內氏), 호소가와씨(細川氏) 등 개별 다이묘들을 독립국가로 인식했던 것을 반영한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 25) 교또(京都)까지 방문하여 일본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지녔고, 임종시에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和)를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15세기의 이러한 자세가 16세기가 되면서 달라졌다. 특히 신숙주의 방문 이후 중앙 정권 차원에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다. 자연히 일본에 대한 정보 파악 수준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바로 이 시기에 일본에는 조총이 전래되었고(1543), 히데요시가 분열된 전국시대를 통일하는(1585) 등의 격변이 일어났다.
반대로 일본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쓰시마가 있었다.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던 쓰시마 사람들은 무시로 조선을 드나들면서 조선말을 배우고, 내부 정보를 빼내는데 열심이었다. 왜란 당시 그들은 일본군의 통역으로, 혹은 ‘길잡이〔嚮導〕로서 고스란히 일본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었다. 양국의 이 같은 차이는 전쟁 초반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 가격1,800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13.04.23
  • 저작시기2009.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4078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