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개항시기의_조선과_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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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개항시기의_조선과_일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기술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동도서기론을 바탕으로 한 국가개혁을 구상하였다. 즉, 서구에 대한 문호개방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응해 서구의 기술과 무기체계는 받아들이되 전통적 체제나 가치는 유지강화하겠다는 것으로, 근대 국민국가를 창출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미봉책이었다. 일본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응하여 양보와 타협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수세적 대응책이자 실제로는 실효성이 없는 무대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도서기론의 대두를 비롯하여 1880년대 초반에 조선왕조가 추진한 일련의 근대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
3)개혁의 쌍두마차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수립한 국민국가 수립론과 동도서기론은 1880~90년대에 조선이 추진한 개화자강 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자 이를 추동한 쌍두마차였다. 개화기에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근대화 모형이 중국식과 일본식 혹은 동도서기론과 국민국가 수립론이었다고 할 때, 돌이켜보면 후자가 훨씬 더 바람직한 모델이었다. 전자는 서양 기술이 우월성만 인정하고 그 기술문명을 꽃피운 토대인 서구 근대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었다.
4.수포로 돌아간 근대 조선의 꿈
1)험난한 개화자강 운동의 길
조선의 근대화 운동은 중국의 조선 정책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부침을 거듭했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이홍장은 조선의 개화자강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80년 조선은 중국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본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중국과 일본에 영선사와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모토로 서양의 기술만 수용한다는 중국의 양무운동과 적극적인 서구화를 통해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도모한 일본의 ‘문명개화’ 운동에서 각각의 장점을 취사선택하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자강 운동의 앞길은 험난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개방과 자강을 통한 국가생존 전략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장애가 극복되어야 했다. 그 하나는, 개방과 자가의 필요함을 설득해 나감으로써 이에 반발하는 위정척사파에 동조하는 일반 백성들의 보수적 정서를 무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양 세력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나가야 했던 점이다.
2)근대 조선의 상황
중국은 임오군란 이전까지는 조선을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고 자국의 방어에 필요한 군비를 갖출 수 있게 함으로써,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러시아나 일본의 진출을 견제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조선에 대한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양국가들과 조선이 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도 적극 중재하고 나섰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일어난후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이 팽팽히 맞서는 국면이 전개되면서 중국이 바라던, 열강들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중국은 종래의 소극적 간섭정책에서 일본의 팽창주의에 전면적으로 맞서는 정책으로 전환함으로써 조선은 양국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Ⅲ결론
과연 조선이 능동적으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로만 자족했을까? 물론 우리나라도 조선 후기부터 근대 지향적인 실학사상과 자본주의의 싹이 발아하고 있었으며, 개항 이후에도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 운동 등 근대국가 수립에 매진 했지만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이를 모방한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 때문에 자주적인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했다. 일본이 근대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 이전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적 역량이 조선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도 아니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의 대응능력이 탁월했기 때문도 아니다. 또 일본이 식민지 종속의 길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근대국가 수립기에 외압이 거의 없었고 발빠르게 서구에 문호 개방을 했으며 조선을 침략하여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더 빨리 시작했더라면 서구 근대문물의 따라 배우기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 탐험에 열중하던 1860년부터 20여 년 동안 우리는 미몽에 사로잡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시간을 허송했으며, 서구 근대문물을 능동적으로 섭취하는데 미흡했다.
여기서 한 세기 전 우리의 참담한 실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결국 우리는 서구 국가들이 두 세기 전에, 그리고 일본이 한 세기 전에 달성한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떠안고 있다. 이같은 실패의 역사에서 한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역사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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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07
  • 저작시기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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