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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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교육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조선시대의 교육

1. 조선의 사회와 문화

2. 학교제도와 학규
 1. 성균관
 2. 4학
 3. 향교
 4. 서원
 5.서당
 6.잡과
 7.학규

3. 과거제도와 교육
 1. 과거제도의 시행
 2. 과거제도의 종류
 4. 과거제도와 학교교육과의 관계

4. 조선의 교화정책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는 향시를 통하여 120명을 선발하였다. 응시과목은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이며, 시험관은 3명으로 하되 그 중 무관2명, 문관1명으로 하였다.
▷ 복시 : 무과 복시는 식년봄에 초시합격자로서 한성에서 병조와 훈련원의 주재 하에 회시(會試)하여 28명을 선발하고 시험과목은 초시와 동일하게 무예와 그 밖에 4서5경 중 1서, 무경(武經)7서,6서 중 1서를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택하게 하였고, 강서(講書)도 아울러 시험케 하였다.
▷ 전시 : 무과 전시는 왕의 임석 하에 복시 합격자 28명을 기격구(騎擊毬)·보격구(步擊毬)·강서(講書)로 시험하여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의 서열을 결정하였다.
▷ 무과도시(武科都試) : 무과도시는 매년 춘추에 병조와 훈련원, 지방은 각 도 병사의 주관 하에 군사, 동·서반의 종5품 이하의 한량(閑良)등의 자원에 의거 시험으로 선발하였다. 또한 무과에도 식년시 이외에 증광시, 별시, 알성시, 춘당대시 등 많은 특별시험이 있었다.
===>무과의 합격자는 무과출신이라 하여 대과와 같은 품계를 주고 별시위(別侍衛) 또는 훈련원의 권지(權智)로서 있게 하였다.
4) 잡과 : 잡과는 일종의 기술직 시험으로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등 4개 부분이 있었다. 대과나 소과 없이 단일과로 2단계의 시험을 거쳐야 하며 전시는 없었다. 또한 식년시 외의 특별시험은 없었고, 증광시가 가끔 있을 뿐이었다. 잡과는 특수기술과목에 대한 기술원을 위한 과거인 만큼 중앙이나 지방 관아의 특수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응시하였다. 초시는 식년전 가을에 중앙세서 각사(各司)의 주관 하에 실시하고, 복시는 각사와 예조가 합동으로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각각 그 전문에 따라 달랐다. 기술관의 사회적 신분은 중인계급이었는데 기술직은 그들에게 독점 전승되었고, 양반계급은 기술직인 잡직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상민과 천민은 이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잡과에 합격하면 백패를 주고 역과 1등에 종7품, 2등에 종8품, 3등에 종9품의 품계를 주어 사역원의 권지로 배치받았다. 음양과, 의과, 율과 등은 1등에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에는 종9품의 품계를 주어 소속관청에서 권지로 근무하게 했다.
▷ 잡과의 종류 및 주관부처
종류
분과
정원
주관관청
초시
복시
역과
한학
45
13
사역원
몽학
4
2
왜학
4
2
여진학
4
2
의과
의학
18
9
전의감,혜민서
음양과
천문학
10
5
관상감
지리학
4
2
명과학
4
2
율과
율학
18
9
형조
4. 과거제도와 학교교육과의 관계
학교의 교육목적은 인재양성에 있었고, 과거는 국가의 유용한 인재를 선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조선시대는 국가의 이념을 유교에 두었기 때문에 유교는 전영역에 걸쳐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유교숭상의 정신은 현실적으로 문관우대로 나타났고, 교육 역시 성균관이나 4학 향교 등 관학의 교과면에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의 경전이 전부였다. 말하자면 학문의 중심은 사람됨의 학문에 있었기 때문에 실업교육이나 무술교육은 인간됨 다음의 문제였다. 국가적인 면에서 볼 때도 당대 인재라는 것은 유교적인 소양을 가진 인간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과거와 학교교육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학교교육과 과거를 연계는 성균관 유생의 과시(科試) 특전에서 볼 수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과 성균관 유생에게만 주어지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실시하는 과거시험으로는 관시(館試), 도회(都會), 알성시(謁聖試), 절일시(節日試), 황감시(黃甘試), 전강(殿講), 도기과(到記科), 정시(廷試) 등이 있었다. 이와같이 국가에서는 성균관 유생에게 수시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하였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시험방식이 학교의 교육과정과 학문적 경향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는 강경론과 제술론의 대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는 문과의 초시와 복시의 초장시험 방식을 강경(講經)으로 할 것인지 제술(製述)로 할 것인지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되었다. 강경은 경서의 뜻을 물어보는 구술시험이고, 제술은 논문식으로 답안지를 써내야 하는 필답시험이었다. 과거시험은 초장에 떨어지면 중, 종장은 보지도 못하고 탈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초장에서 보이는 경서의 고시과목을 강경으로 하느냐 제술로 하느냐 하는 것은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이 문제는 학술논쟁의 차원을 넘어 성균관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논쟁은 최종적으로 제술의 방식으로 결정되어 [경국대전]에 명기되었지만 과거시험과 학교교육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4. 조선의 교화정책
성리학의 정치이상은 덕치주의와 왕도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이에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의 교육은 백성을 교화시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덕치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교화라는 이름 아래 백성들의 의식과 사회의 예속질서를 유교이념으로 순화시키려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 예로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일반 백성에게 보급함으로써 윤리적인 실행의 표본으로 삼게 했고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주자가례를 준행케 함으로써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사회규범을 기틀로 확립시켰다.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상을 주는 것도, 향약을 시행한 것도 모두 조선의 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민족교육문화사 - 김경식
교육사 및 교육철학 - 고벽진, 이인학, 윤선오, 이위환, 이경혜, 안현주
이만규. 1991. 조선 교육사1
이원호. 2002. 조선시대 교육의 연구
최윤용. 2008. 논문: 서당(書堂)의 교육방법(敎育方法)과 현대적(現代的) 의의(意義)
이남희. 1998. 논문: 조선시대 잡과방목의 (雜科榜目) 자료적 성격
장덕삼. 2003. 논문: 조선시대 서당의 변천과정과 현대교육에 미친 영향
조지만. 2008. 논문: 조선시대의 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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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4
  • 저작시기2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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