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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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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강화도의 역사
1. 삼국시대
2. 고려시대
3. 조선시대

Ⅲ. 강화도의 특징

Ⅳ. 강화도의 특산품과 시장
1. 강화 화문석과 인삼
2. 우리옥
3. 대선정
4. 강화읍의 토산품 판매점과 인삼센터
5. 풍물시장
6. 강화 5일장

Ⅴ. 강화도의 주요명소
1. 갑곶 돈대
2. 강화읍성
3. 고려궁터
4. 마니산
5. 정수사
6. 전등사
7. 초지진

Ⅵ. 강화도의 전설
1. 삼랑성 전설
2. 나부상 전설
3. 마니산의 전설
4. 은행나무 전설

Ⅶ. 강화도와 강화도천도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면서 비로소 결실을 거두게 된다. 강화군은 그 때부터 해마다 전국체전 주경기장을 밝힐 성화 행사를 위해 칠선녀와 성화주자들을 뽑아 의식을 치르는 등 정성을 다하고 있다.
4. 은행나무 전설
경기도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전등사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노승나무, 동승나무라 부르기도 하고 암컷 수컷이라 하여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기도 하는 이 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관하여 내려오는 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불교는 매우 탄압 받았다. 유생들 혹은 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탄압을 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승려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여도 종교적 인내로 다 견디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전등사에 관가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어려운 요구를 하였다.
절에 있는 은행나무의 은행이 열릴 쯤 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매를 회수해 갔는데 이번에는 은행열매를 스무 가마니만큼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의 양은 열 가마니 정도였다. 관가에서는 수확량의 두 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절의 한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승에게 알렸다.
그는 동자승에게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 타일렀지만 곧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열 가마니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들 나라에 대한 반항이라며 탄압의 근거로 삼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노승은 백련사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추송스님은 도술이 뛰어나니 어떻게 해볼 수 있으시겠지.\' 그는 동자승을 추송스님에게 보냈다. 동자승과 함께 도착한 추송스님은 은행나무가 더 열리게 하는 3일기도를 하기로 하고 곧 기도에 착수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이고 군관도 찾아 왔다. 그리고는 불가능함을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멀쩡하던 군관의 눈이 맞은 듯 부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일째 되는 날 늦은 오후 은행나무에서 3일정성의 막바지에 다다라 염불소리가 멎었을 때 추송스님이 축원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나무의 열매를 앞으로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 먹구름이 몰려와 뇌성과 함께 때 아닌 비가 무섭게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스님도 노승도 동자승 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말들 하였고 이후 전등사에 대한 탄압은 없어졌다 하였다. 전등사에는 지금도 그 은행나무만이 그 사연을 안은 채 서있다.
Ⅶ. 강화도와 강화도천도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강화 천도는 1232년 최우에 의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행되었다. 이 강화 천도는 그 후 몽고로 하여금 침략의 구실을 보태어 주었고 몽고의 재침략을 촉진시켰으며, 민중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민심의 이탈을 가져왔다.
강화 천도는 몽고의 오만 불손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 의식을 자극시킨 점, 그리고 그들의 지나친 경제적 수탈, 게다가 단순한 공물의 징수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 등 인적 자원에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하였다는 점과 다루가치를 비롯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 등 위의 여러 가지 이유로 단행되었다. 또한 우리는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도 간과 할 수 없다.
천도 이후의 강화 경영에 있어서도 그들은 연경궁과 최우의 저택을 見子山 부근에 위치시켰다. 한편, 강화도에는 갑작스럽게 인구가 유입되고, 무질서한 도시구조로 대형 화재의 발생이 빈번하였다. 방어 시설 면에서도 내성, 외성, 중성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몽고측은 강도의 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한다. 이러한 강도 시대국가 재정의 전체적 고갈에도 불구하고 무인 정권은 그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다고 보아진다.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 침략에 대한 항전의 주체적 역할을 한 것은 민병들로서 초기의 국내 통치 계급의 학정에 반대하여 궐기한 농민반란의 폭동군인 초적들과 노예나 부곡민들로 된 천민들이 주요한 항전세력이었다. 이들 농민, 천민의 항전이 바로 강력한 몽고 침략에 대하여 30년간이나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의가 주살된 1258년 戊午정변으로 최씨 정권은 종말은 고하고 왕권복고의 절차가 취해졌다.
Ⅷ. 결론
강화도는 반만년 한반도의 역사의 시작이며 또한 굵직한 사건들에 언제나 휩싸인 고통의 땅이다. 강화도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등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개경이나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과정으로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였고, 고려시대에는 몽고족을 피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던 곳으로 38년간 고려의 수도로서 기능을 하였으며, 또한 조선시대의 강화도야말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약탈당하고 불태워지던 역사를 가졌다. 고려 몽고족에 이어 조선시대에는 여진족에 의한 병자호란을 시작으로 하여 프랑스에 의한 병인양요, 미국에 의한 신미양요 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일본의 운요호에 의하여 강화는 굴복하고만 것이다.
강화는 전시대에 걸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마디로 피에 물든 한국사의 축소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 속에서도 일궈지고 지켜진 문화, 특히 팔만대장경, 상감청자 등은 저항 속에서 일구고 승화시킨 것이어서 귀하고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조선시대의 외규장각에 비치된 중요한 서적들이 이민족에 의해 약탈당하거나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참고문헌
- 김도현, 태백산 천제단과 마니산 참성단의 의례 비교, 동아시아고대학회, 2010
- 윤은미, 강화도 지역의 현장학습을 통한 향토사 교수학습방안, 이화여자대학교, 2010
- 조소현, 강화도 시간여행, 문학동네, 2009
- 최선웅, 신 한국관광여행, 성지문화사, 2003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1996
- 홍순민, 강화가는 길, 江都의 宮, 강화 한 바퀴, 황해문화 1113,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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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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