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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궁예, 궁예 출신과 신라관, 궁예 사상, 궁예 구비전승, 궁예 리더쉽(리더십), 궁예와 삼국사기]궁예의 출신과 신라관, 궁예의 사상, 궁예의 구비전승, 궁예의 리더쉽(리더십), 궁예와 삼국사기, 궁예의 평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궁예의 출신과 신라관

Ⅲ. 궁예의 사상

Ⅳ. 궁예의 구비전승

Ⅴ. 궁예의 리더쉽(리더십)

Ⅵ. 궁예와 삼국사기

Ⅶ. 궁예의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건국 후 왕건 집단에 의한 왕건가의 신화 만들기가 궁예이야기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햇빛이 비치자 글씨가 나타났다는 것 역시 궁예 출생 시 지붕에 비췬 무지개 같은 흰빛과 짝을 맞추어 하늘이 궁예와 왕건의 운명을 예시한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거울의 임자가 鎭星塑像이었다는 점은 밀교적 秘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太祖世家에는 勃颯寺가 熾盛光如來를 모신 절이고 진성소상은 치성광여래 앞에 거울을 들고 서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이 치성광여래는 밀교에서 받아들인 부처라는 점에서 발삽사는 밀교신앙과 관련된 사찰이었다고 생각되고 진성소상이 현현하여 거울을 전해주었다는 이야기구성은 곧 예언이나 비의를 의도적으로 환기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살핀 <궁예전>의 전후반부 이야기를 볼 때 그 이중적 성격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반부가 당대구비전승의 지배적 영향 아래서 자연스럽게 구성된 구비주도형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문헌기록을 담당한 상층지배집단이 구전을 의도적으로 재구성하여 형성된 문헌주도형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⑦의 경우 그 비슷한 이야기조차도 구전현장에서는 자취를 찾을 수 없고, ④의 경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조사된 부석사 관련 전설에 보이지 않고 ⑤도 구비전승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⑤나 ⑧ 정도가 변형된 형태로 전승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지배집단의 의도가 반드시 의도대로 구전의 현장에 관철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Ⅶ. 궁예의 평가
궁예가 태어난 5월 5일은 중오일(重五日)로 불길한 날이라고 주장한 일관(천문을 맡은 관리)의 말에 대해서 신라 때부터 명절로 꼽혀온 단오가 어떻게 궁예가 태어난 해에만 불길한 날이어야 하는지 근거가 없다. 막연히 불길한 날이라고 아이를 내다 버리라고 했을 뿐, 왜 갑자기 명절이 불길한 날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언급을 들은 적이 없다. 이것은 승자인 왕건 무리의 반역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조작한 것 같다. 또, 궁예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악했다는 증거로 꼽히는 \'태어나면서 이가 났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궁예가 일찍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빨랐다는 사실에 불과하다.
궁예가 정한 궁예가 국호를 변경한 것은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첫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초기 점령지역이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결과였다. 이후 신라 백제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고구려 중심의 국호를 바꿔야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포함하는 마진(대동방국이란 뜻)으로 바꾼 것은 그래서 옳은 선택이었다. 국호 변경은 고구려적 요소와의 결별이자 삼국통일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에 칼질을 한 사건은 당시 반신라적인 민심의 성향을 대변하고 결집시키는 동시에 1,000년 동안 지속돼 온 신라의 관념을 단칼에 끊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소수 세력에 불과했던 궁예가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후삼국이라는 난세에 궁예가 3년 만에 홀로 설 수 있었던 비결은 개인적 자질에서 찾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성을 공격할 때 습(襲), 격(擊), 격추(擊追)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고, 병졸들과 매일 밤 숙식을 같이 할 정도였던 궁예였기에 아무런 배경도 없던 재가화상에서 장군으로, 이어 임금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894년 피를 흘리지 않고 명주를 점령해 장군으로 추종 받은 것이나 중부권 실력자 양길의 수하에서 급속히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사사로움 없이 위아래를 대하는 통치자적 자질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궁예의 몰락배경에 대해서는 사서에서는 궁궐건축을 위해 무자비하게 조세를 거두고 부인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참살하는 등의 학정을 지목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본래 세력이 송악 밖에 없었던 왕건이 고구려계 호족들이 궁예의 철원으로의 재천도와 청주주민의 수도이주정책 등으로 정치에 불만을 품고 왕건을 쿠데타로 내몰았던 것 같다.
왕건이 30살 때 바다 가운데 솟아오른 9층 금탑 위에 올랐다는 꿈을 꾸었다는 사서의 기록은 역으로 그가 일찌감치 역모를 품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궁예 몰락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환선길과 이흔암이 반란을 일으키고 30여 개 성이 후백제로 투항했다는 점에서도 왕건의 등극은 도덕적 승리가 아닌 권력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궁예는 쫓겨나 달아나던 중 밭에서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 농민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궁예는 호족들에게는 마구 횡포를 부렸을지는 몰라도 백성들에게는 아직도 미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궁예가 도망쳤을 때 철원의 주민들이 힘을 모아 왕건의 군대를 막지 않았을까? 그래서 왕건은 아직도 궁예의 영향이 건재함을 알고 궁예를 비하시켜 자신의 정당성을 키우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제기해 본다.
후삼국 시대에서 왕건이 궁극적으로 승자가 됐지만 견훤이나 궁예가 그 들러리로 여겨져서는 안 되고 한 시대를 이끈 동반자로 자리매김 하는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의 당면 과제인 통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자신의 사명을 가장 잘 실천했던 인물의 하나가 궁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궁예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승리파의 영향으로 자료가 불충분해 추측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유적을 찾기 위해 노력 할 때 후삼국시대 세상을 구할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궁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좋은 결과를 맺진 못했지만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던 궁예에게 박수를 보낸다.
참고문헌
김두진 / 궁예의 토착 불교사상, 국민대학교 출판부, 2008
양경숙 / 궁예와 그의 미륵불 사상, 국민대학교, 1989
유인순 / 전설에 나타난 궁예왕,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6
조인성 / 궁예의 출생과 성장,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89
조현설 / 궁예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미, 한국구비문학회, 1995
정구복 / 새로 읽는 삼국사기 : 동명성왕에서 궁예·견훤까지, 동방미디어,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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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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