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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불교 선(禪), 선종, 원각경, 초의, 회화사상, 위빠사나, 성품오득]불교 선(禪)과 선종, 불교 선(禪)과 원각경, 불교 선(禪)과 초의, 불교 선(禪)과 회화사상, 불교 선(禪)과 위빠사나, 원불교 선(禪)과 성품오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불교 선(禪)과 선종

Ⅲ. 불교 선(禪)과 원각경

Ⅳ. 불교 선(禪)과 초의
1. 초의는 ????선문사변만어????를 통해 백파의 ‘삼종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이종선을 주창하였다
2. 초의는 선종 전통의 기원과 정통성의 근거를 석존에게 두었으며, 인도 조사들의 선사상도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3. 초의는 선의 시간적, 공간적 초월성과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4. 초의는 선 이해에 있어서 근기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선종 종파의 우열을 정하는 것도 부정했다
5. 초의는 선문에서 흔히 쓰는 기본용어의 참뜻을 해설하였으며, 그 용어들을 사용할 때는 합리적으로 적용할 것을 강조했다
6. 초의는 선수행자의 상황윤리를 강조했다
7. 초의는 진보적, 개방적 자세를 가지고 실학적, 고증학적 방법에 의해 자신의 담론을 전개했다

Ⅴ. 불교 선(禪)과 회화사상

Ⅵ. 불교 선(禪)과 위빠사나

Ⅶ. 원불교 선(禪)과 성품오득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러나 자기집을 못 찾아 헤매는 미아가 많이 생기는 것이 문제이다) 어떻게 자기집 찾는 것을 어렵다 할 것인가. 우리 본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소태산대종사는 초기교단의 심통제자 십 여 명이 언답을 막고 나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자 일은 몸으로 성심껏 노력하면 되지만 깨닫는 길은 참으로 어려워서 어떻게 할지 엄두가 안난다는 제자들의 말씀을 듣고 소태산은 깨닫는 길이야 말로 알고 보면 코풀기보다 쉽다고 제자들에게 단언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말이다.
이렇게 쉬운 것이지만 꼭 깨닫지 아니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자성을 깨닫지 아니하고서 수행을 하는 것은 오렴수요, 무승자박(無繩自縛)이 되므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견성을 해야된다. 그러므로 견성을 하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의단(疑端)이 끊어지지 아니하며 어디에 사로잡혀 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견성해야만 수행의 방향이 서진다.
견성의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우두계(牛頭系)의 육조(六祖)라하는 혜충(慧忠 683-769)이 자주 써왔다는 점에서 혜능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혜능에 와서 입장은 분명히 되었다. 혜능 이전에 천태계에서 관(觀)을 써왔고 북종계에서 간(看)을 썼으나 신회와 더불어 혜능은 견(見)으로 성품을 분명히 이해하게 한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즉 능관(能觀), 소관등(所觀等) 주객이분의 분화에 대한 비판으로 주객이분 되어 보는 것이 견이 되는 견성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심결에 견성은 마치 자기눈을 자기가 볼 수 없듯이 물건은 잘 보이나 자기 눈만은 안보이는 것을 알아 다시 보려고 하는 욕심이 없어지면 곧 견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견성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혜능의 단경에서 찾아보자.
① 자성본래가 청정한 것을 보는 것 - (菩薩戒經云 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
② 진, 망을 다 놓아 버리고 평등한 상태에 이르는 것-(當生般若 除眞除 妄卽見佛性)
③ 지혜관조로 모든 법에 취하지도 않고 사하지도 않는 평등한 상태를 견성이라 한다. -(以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
④ 자심이 바로서서 번뇌와 진노가 정견속에 물들지 아니하면 견성이다.-(不執外修 但於自心 常起正見 煩惱塵勞 常不能染 卽是見性)
⑤ 깨달은 사람은 보리 열반, 해탈, 등을 세우지 않고 또한 법도 얻었다 할 바 없으되 능히 만법을 건립한다.-(若悟自性 亦不立菩提 涅槃 亦不立解脫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萬法 是眞見性)
⑥ 견성한 사람은 내세워도 얻고 안내세워도 얻어서 거래에 자유하여 걸리고 막히지 않는다.-(見性之人 立亦得 不立亦得 去來自由 無滯無碍)
이외로도 많이 있으나 이상의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 내용을 다시 다음 몇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본무번뇌 본자청정 본래평등 본래무염 본자연, 본개방, 본자유(本無煩惱 本自淸靜 本來平等 本來無染 本自然, 本開放, 本自由)의 상태를 똑바로 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견성만 하게되면 일체가 자연히 밝아지고 열려진다고 보았다. 조계별전(曹溪別傳)에 보면, 인종(印宗)법사가 혜능이 정사임을 알아보고 혜능은 홍인에게서 무슨 법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한다. 혜능은 홍인에게서 견성에 대한 말씀은 들었으나 선정이니 해탈이니 무위이니 무루법이니 하는 말은 듣지 아니했다(唯論見性, 不論禪定, 解脫, 無爲, 無漏法)는 것이다. 이토록 견성을 기초로 하는 것은 마음의 본래를 알면 망상이 불생한다(마조어록)는 입장에 이른다. 그러므로 견성만이 바른 수행이 되고 견성만이 마음의 안정과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Ⅷ. 결론
선은 원래 대승불교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그 사상의 연원이 인도에 있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즉 선은 대승경전을 소의(所依)로 하고 있다. 그러나 선은 선으로써 중국에서 별도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선이란 글자는 범어(梵語)의 선나(禪那 : Dhyana)에서 왔지만 오늘날의 선은 전혀 인도식의 선나는 아니다. 아니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선사상은 중국에서 그 행위적 방면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인도식의 선나는 일종의 관법으로, 마음을 응축시켜 적정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중국에서는 그러한 이론보다도 생활 그 자체, 즉 우리를 평소의 행동, 바로 그 위에서 선을 활성화 시킨 것이다. 달마에서 혜능까지의 5,6대는 오로지 하나만을 고수하고 청정함을 살피며 마음을 보는 것 따위가 설해졌고, 또 그를 실천 수행 하였다. 혜능에 이르러서야 선정과 지혜는 오로지 하나일 뿐임이 설해졌고, 견성(見性)의 경험이 중시되어 비로소 중국 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견성 경험을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신비론적 見神 경험이라든가 응집된 마음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어쨌든 견성 경험을 知와 行이 하나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선은 자연히 動과 靜 양면을 갖추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 사상은 無知의 知요 無念의 念이며, 無心의 心이다. 無意識의 意識이요, 無分別의 分別이며, 상비의 상즉이다. 事事無碍며 萬法如如이다.
따라서 선사상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할 때 어떤 종교적 입장에서 종교 경험적 유사성을 찾으려하나 실상은 전혀 다른 신론, 인간존재론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지경을 단언하여 무시해 버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로서 바른 신앙을 정립하되 넓은 아량으로, 선을 매체로 하여 기독교가 몸(肉)의 대화를 펴나가게 될 때, 새로운 대화의 신학이 열리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런 연구에서 자칫 기독교의 생명력을 결여한 혼합주의에 이탈될 가능성을 묵과해서도 안될 것이다.
참고문헌
강건기(1999) : 위빠사나 선과 정신건강,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신소연(2009) : 현대회화에 나타난 선사상과 표현 연구, 홍익대학교
이희영(1999) : 원각경의 수행체계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채정복(2010) : 초의선사의 선(禪), 한국불교사연구소
한진만(1977) : 선종의 정신과 회화, 홍익대학교
한기두(1982) : 무시선법의 연구 : 선의 원리를 중심하여,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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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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