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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아동문학,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자연주의문학,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일본한문학,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일본신파극,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남북국시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아동문학
1. 이와야 사자나미의 도태랑주의
2. 방정환의 동심주의

Ⅲ.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자연주의문학
1. 용어
2. 외래문화 수용의 여건상의 차이
3. 자연주의의 발생여건

Ⅳ.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일본한문학

Ⅴ.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일본신파극

Ⅵ. 한일문학(한국 일본 문학)과 남북국시대
1. 신라와 일본간의 사신왕래 및 창화
2. 발해와 일본간의 사신왕래 및 창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해사가 13회로, 도합 43회의 사신 왕래가 있었으므로 3.6년에 한 번꼴로 사신의 왕래가 있었던 셈이다. 신라와 일본 양국의 사신 왕래에 비해 사신왕래시의 창화가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회풍조]에는 한일 양국 문사들간의 창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들은 보이지 않지만, [문화수려집]에 실려있는 발해인의 한시작품중에는 일본문사와 창화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다. 우선 [문화수려집]에 실려 있는 발해인의 한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숫자는 [문화수려집]에서의 일련번호)
● 왕효렴 ; 16 - <봉칙배내연시>, 18 - <춘일대우>, 39 - 재변정부득산화 희기량개령객사, 40 -<화판령객대월사향견증지작>, 41 - 종출운주서정 기량개칙사
● 석인정 ; 17 - <칠일금중배연시>
신으로 이국땅에 있으면서 느끼게 되는 객수야 짐작되는 바이지만, 이들 작품 중에는 양국 문인간의 우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있어 주목된다.
적적주명야 단단백월륜쓸쓸한 여름날 밤에 / 둥그렇기 그지없는 밝은 달.
기산명영철 만상수천신산에는 밝은 그림자 뚜렷하고 / 온 천지에 물과 하늘빛이 새롭다.
기첩간생창 기정대동신버려진 여인 보니 슬픔 북받쳐 / 나그네 마음으로 신명을 대한다.
수운천리격 능조양향인누가 말했던가? 천리를 격해 있어도 / 두 고을사람을 비출 수 있노라고.
마지막 행에 \'천리를 격해 있어도 능히 두 고을사람을 비출 수 있다\'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가 문제이다. \'버려진 첩\'이라는 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두 고을사람\'을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가 영객사 판상금계이 왕효렴에게 준 <대월사향>이라는 작품에 대한 화운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자신이 발해로 귀국한 후에라도 우의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판상금계의 <화발해대사견기지작>에 \'한 번 상봉하였는데 마치 옛날에 본 듯하니 / 교유하는 정이 스스로 옛사람과 한 가지로다\'(일면상봉여구식 / 교정자여고인제) 라는 구절을 보더라도 그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 같은 양국 문인간의 우의는 상원복적의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월야언리> \'지세와 풍우는 비록 지역을 달리한다 하나 / 천문과 달님은 오히려 빛을 같이 한다네 /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 한결같이 구름사이 달빛과 같아 / 밤마다 그대를 따라 먼 고을에 이르리라\' (지세풍우수이역 / 천문월토상동광 / 사군일사운간영 / 야야상수도원향)라는 내용을 단순한 외교적 수식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중웅왕 역시 발해사신 왕중서(왕승기인지 왕효렴인지 분명하지 않음)에게 자신의 심회를 담은 <서회정왕중서>이란 작품을 남겼다. 양국 문인들은 창화를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우의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발해사신과 창화한 시로 [문화수려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숫자는 [문화수려집]의 연번임)
● 거세식인, 24, <춘일전야주사봉사존문발해객>
● 판금웅, 35, <추조청안 기발해입조고판관석녹사>
● 판금웅, 36, <화발해대사견기지작>
● 자정주, 37, <춘야숙홍려 간발해입조왕대사>
● 상복적, 38, <화발해입근부사공사대용안지작>
이처럼 [문화수려집]에는 양국간의 문학적 교류를 밝혀주는 자료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하지만 발해쪽의 문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러한 자료가 당시 양국간의 문학교류 양상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볼 수는 없다. 비록 17,8세기에 편찬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시화에는 발해와 일본 양국 문인간의 교유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간혹 보인다.
강조강이 <전발해객배구시서>에서 \'앞에 놓여진 노정이 아득히 멀어, 안산의 저녁 구름에 생각을 치달려본다. 후에 만날 기약이 요원하게 되니 홍려의 새벽눈물에 갓끈을 적시누나\'라고 자신의 감회를 쓰자 구가 크게 감탄했다. 몇 년이 지나 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 \'조강은 상공이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하자, 그 사람이 \'당신네 나라에서 어찌하여 문재를 중히 여기기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해 발해에서 역시 문장을 중시했다는 것과 일본 문사와 발해사신과의 문학적 교유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강조강의 친구인 귤정통같은 사람은 가족을 데리고 고려국(일본에서는 종종 발해를 고려라고 불렀다.)에 이르러 문재로써 고관이 되었다 한 것으로 보아 발해에서 문장을 중시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본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것 같다. 발해는 문인을 중시했을 뿐 아니라, 그 사신들 역시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 한 예로, 관원도진이 홍려관에 가서 배정(원문에는 배정으로 되어 있으나 배구의 잘못인 듯)과 창화하는데, 배정이 붓을 잡고 선 채로 문장을 이루므로 도진이 그 민첩함에 감탄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배정의 문학적 재능은 당시의 일본 문인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졌던 모양으로, 그의 체일시 가예부시랑 관승상은 홍려관에 찾아가 그들 일행을 접대하면서 그들과 증수한 시 몇 편이 [국사]와 [관집]에 실려 전한다고 한다. 그 후 연희년간(901-922)에 배구가 사신으로 갔을 때, 관승상의 아들 관순무가 사신으로 온 배정의 아들 배구와 만나 시를 지으니 배구가 관순무의 시를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양국 문사간의 문학적 교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 앞서 언급한 바 있었던 한국계 문인인 도재중은 배구의 귀국시 이별에 앞서 \'그대와 다시 만날 날 기약이 없으니, 이날부터 목을 길게 빼고 북해의 바람을 바라보리라\'는 내용의 시를 주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김윤지 / 한·일 자연주의 소설 비교 연구, 부산외국어대학교, 2011
김태준 / 근대화와 한일문학의 비교, 일본문제연구소, 1975
양승국 / 한국 근대문학 형성에 미친 일본 신파극의 영향에 대한 연구, 한국극예술학회, 2001
오오타케 키요미 / 한일 아동문학 관계사 서설, 청운, 2006
최광준 / 고대한일문학과 문학적 풍토, 신라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1999
한재룡 / 일본한문학의 정착과정에 관한 고찰, 경남대학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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