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몽고), 자연, 신앙, 정치, 창세신화, 언어체계]몽골(몽고)의 역사, 몽골(몽고)의 기본정보, 몽골(몽고)의 자연, 몽골(몽고)의 신앙, 몽골(몽고)의 정치, 몽골(몽고)의 창세신화, 몽골(몽고)의 언어체계 분석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몽골(몽고), 자연, 신앙, 정치, 창세신화, 언어체계]몽골(몽고)의 역사, 몽골(몽고)의 기본정보, 몽골(몽고)의 자연, 몽골(몽고)의 신앙, 몽골(몽고)의 정치, 몽골(몽고)의 창세신화, 몽골(몽고)의 언어체계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몽골(몽고)의 역사

Ⅲ. 몽골(몽고)의 기본정보
1. 위치
2. 면적
3. 인구
4. 인구밀도
5. 수도
6. 정체
7. 공용어
8. 통화
9. 환율
10. 1인당 국민총생산

Ⅳ. 몽골(몽고)의 자연

Ⅴ. 몽골(몽고)의 신앙

Ⅵ. 몽골(몽고)의 정치

Ⅶ. 몽골(몽고)의 창세신화

Ⅷ. 몽골(몽고)의 언어체계
1. 형태적 특징
1) 형용사의 구성
2) 형용사의 파생
3) 형용사의 비교급
2. 통사적 특징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만, 부리야트의 신화에서는 땅의 신으로 나타난다고 하므로, 에를릭의 성격을 현재로서는 확정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Ⅷ. 몽골(몽고)의 언어체계
1. 형태적 특징
1) 형용사의 구성
단일 형용사와 파생 형용사로 구성된다. 파생 형용사는 명사에 파생접사가 결합하여 파생된 형용사와 동사에 파생접사가 결합하여 파생된 형용사가 있다. 또한 형용사 어간 자체에서 의미가 강화되거나 약화된 형태로 파생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2) 형용사의 파생
파생접사와의 결합으로 동사, 명사에서 파생되거나, 명사, 부사와 동형인 형용사가 존재한다.
ㄱ. 명사에서 파생 : -n, -tai, -t, -lag, -rxag(lxag), -rxuu, -cag, -mcag
nooco 울(wool) noocon 울의(woolen)
oxaan 지혜 oxaantai 지혜로운
elce 모래 elcerxag 사막의
ㄴ. 동사에서 파생 : -mal, -oo, -mgai, -mxai, -oon, -ngoi, -aa, -xai, -mag
xat 말리다 xataa 딱딱한
daca 익숙하다 dacamtgai 친숙한
nebter 통과하다 nebterxii 완벽한
ㄷ. 형용사 어간에서 의미가 강화되거나 약화된 형태로 파생
의미약화: -xai, -btar, -doo
의미강화 : -b
ㄹ. 명사와 동형 : bruu(wrong, fault)
부사와 동형 : sain(good, well), jijig(small)
3) 형용사의 비교급
형용사 자체의 어형 변화 없이 비교급은 비교대상에 탈격이 결합하여 형용사 앞에 온다. 최상급도 부사의 수식으로 이루어진다.
minii opoo cinii opoon-ooc tom
my room your room-COMP(abl) big
‘내 방이 너의 방보다 크다’
2. 통사적 특징
명사 앞에서 형태 변화 없이 수식하며(ㄱ), 서술어로 쓰일때는 계사를 동반해야 하며 계사가 활용을 한다.(ㄴ,ㄷ) 그러나, 현재시제에서는 계사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대로 주어와 병치된다.(ㄹ)
ㄱ. bi goej camc ablaa
I nice shirt buy-PAST
\'나는 멋있는 셔츠를 샀다‘
ㄴ. ter bajacgalantai baina
He joyful be-PRES
\'그는 즐겁다‘
ㄷ. bi ajilchin baican
I worker be-PAST
\'나는 일꾼이었다‘
ㄹ. ene camc goej
this shirt nice
\'이 셔츠는 멋있다‘
Ⅸ. 결론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 후에 이색을 초청하였는데 이색이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자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린 것을 봐도 알 수 있다.(조선왕조태조실록)
이러한 이색이란 사람이 아버지 이곡과 당사자 자신이 몽골 과거에 급제하여 황실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란 것을 볼 때, 당시 몽골, 고려 관계를 단순히 압제의 관계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고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일환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성계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고 술잔을 올린 것은 이색이 과거 몽골의 관리였기 때문도 수상이었기 때문도 아니다.(조선왕조 개창당시는 이미 대원제국은 멸망하였고, 고려왕실도 물론 멸망해서 이색의 정치적 권력도 완전히 없어진 상태였다.) 이색의 학문적, 사회적인 명성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색처럼 학문적,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도 몽골관리였다는 것은 단순히 원나라 몽골을 악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너무도 무지한 행동이다.
일제시대보다 몽골침입이 더 잔혹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인명, 재산피해는 더 컸는지 모르겠지만 몽골은 직접 지배를 하지 않았다. 일본처럼 동네 순사까지 일본인 파견해서 조선 사람들이 더러운 꼴을 당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일제시대에 직접적인 지배를 당한 이유로 한국인들은 일제시대이후에 반일감정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몽골에 대한 감정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일제는 경기도 용인지역에 일본 수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800만 조선 농민(그 당시 조선인구의 3분의 1)을 만주로 이동시키고 일본농부 800만 명을 조선에 이주시키려는 인종이동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충렬왕 시절 고려가 흉년이 들자 쌀 지원을 해준 몽골제국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일제는 조선 황제 고종을 독살시키고 명성황후를 휘발유로 태워 죽였지만 몽골은 고려왕실의 요청에 의해 쿠빌라이칸의 딸을 내주고 왕실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개경환도와 혼인은 고려가 원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 때문에 공민왕 시절, 몽골정부는 내란을 막으려고 고려군에게 지원요청을 한 것이었다.(결국 공민왕은 파병하였고 이 당시 몽골의 허약상을 본 공민왕은 이것을 이용 반원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1388년 몽골의 잔존세력 북원은 고려에 다시 지원요청을 하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 고려는 왕건의 유훈인 고구려(실제 이름은 고려)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북방회복을 위해 요동수복을 하려고 파병하였다.
끝으로 고려의 원종은 자신의 왕비가 있음에도 쿠빌라이칸에게 요청해서 몽골공주의 결혼하였다. 게다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유명하다. 하지만 일제가 임신도 못하는 것으로 판정된 일본 왕녀를 강제로 조선왕실에 결혼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발한 고종은 해외망명을 결심하게 되고 발각이 되서 독살 당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고려(고구려)는 대국이므로 말로써 설득이 가능하지만 왜국은 인성이 그렇지 못하다.\"결국 박제상은 고구려에서는 왕에게 간청해서 인질을 다시 데려오지만, 왜국에서는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혹자들이 일제와 몽골 간섭기를 비교하는데 그 추악함에 있어서는 일제가 훨씬 심각하다.
참고문헌
◈ 김혜정(2012), 초원의 나라 몽골을 가다, 태학사
◈ 단국대학교 몽골연구소(2012), 몽골과 한국, 단국대학교출판부
◈ 석재현, 강제욱 외 1명(2008), 몽골, 이른아침
◈ 이태원(2011), 몽골의 향수, 기파랑
◈ 윤은숙(2010), 몽골제국의 만주 지배사, 소나무
◈ 최성수(2011), 일생에 한번은 몽골을 만나라, 21세기북스

키워드

  • 가격6,5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3.07.2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557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