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박은식선생]백암 박은식선생의 연혁, 백암 박은식선생의 유교구신론, 백암 박은식선생의 근대민족주의, 백암 박은식선생의 독립운동활동, 백암 박은식선생의 한국통사, 백암 박은식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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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암 박은식선생]백암 박은식선생의 연혁, 백암 박은식선생의 유교구신론, 백암 박은식선생의 근대민족주의, 백암 박은식선생의 독립운동활동, 백암 박은식선생의 한국통사, 백암 박은식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백암 박은식선생의 연혁

Ⅲ. 백암 박은식선생의 유교구신론

Ⅳ. 백암 박은식선생의 근대민족주의

Ⅴ. 백암 박은식선생의 독립운동활동

Ⅵ. 백암 박은식선생의 한국통사

Ⅶ. 백암 박은식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마지막 시기와 일제 강점기 초기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한번쯤은 꼭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역사학적으로 뛰어난 연구 성과이기 때문은 아니다. 민족 최대의 수난 시대를 온 몸으로 항거하며 헤쳐 나가고자 했던 한 인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외적으로 일본의 침략과 만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우리 나라에도 비밀리에 보급되어 민족혼을 불러일으켜 독립 투쟁 정신을 갖게 하였다. 이에 일본은 매우 당황하여 <조선사>37권을 만들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했다.
박은식은 1919년 3.1운동 때 6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 노인 동맹단을 만들어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해 8월 박은식은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였고, 동시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완성하였다. 이 책은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을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한편 임시정부가 분열과 혼란에 빠지자, 박은식은 1925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기 되어 이를 수습하고, 이듬해 임시 정부의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7월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11월 상하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당시에는 독립 의식을 드높이는 교과서였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의병 활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Ⅶ. 백암 박은식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 문제의 핵심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정부 소재지를 떠나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은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 유고안을 결의한 뒤, 12월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선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하였다. 이에 선생은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를 수락한 뒤, 임시의정원과 협조하여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을 추진하여 갔다.
그 방안은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각종 폐단을 가져온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내각 책임제 정부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각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임시대통령 대리로서 이를 앞장서 수행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5년 3월 임시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이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뒤,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임시대통령으로서 곧 바로 국무령제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통과되자 선생은 신헌법에 의거하여 그 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임시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선생은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사임할 당시에는 병색이 완연하게 드러났고, 결국 그로 말미암아 1925년 11월 1일 66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선생은 “우리가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期成)하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유촉을 남겼으니, 민족 독립에 대한 선생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선생의 장례는 11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상해 영국조계의 정안사로에 모셔졌다. 그러다가 서거 68년만인 1993년 8월 신규식노백린안태국김인전 선생 등과 함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Ⅷ. 결론
박은식은 세계평화적 차원에서 보면, 한국은 독립을 통해 세계평화와 인도주의자의 선봉이 되어 군국주의를 결단내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국혼 즉 전통과 혈통 그리고 민중의 정서에 기초한 원초적이고 유기체적인 민족주의는 국백을 갖지 못한 당시에는 저항적 민족주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강권론으로 규정하고 이에 저항하는 민족단위로서는 의미를 지녔지만, 저항적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인류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이념이 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박은식은 한국의 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이 단순히 우리의 경계와 영역을 확고히 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보고, 제국주의적 경쟁과 제한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대동사상을 주창하였으니, 그것은 평화와 인도주의로써 군국주의의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박은식이 제시한 대동사상은 세계평화와 인도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국가경계를 만들면서도 동시에 국가경계에 매몰되지 않는 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즉 국가주의나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종국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세계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즉 평등과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인류 역사 발전의 방향이며, 이는 자연스런 추세라고 한다. 당시는 강권주의가 평등주의로 교체되는 전환기로, 강권적 제국주의가 날로 극렬해짐을 말기적인 현상으로 보고 평등주의가 부활할 날이 멀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와 같은 역사의 발전 추세로 보아도 한국의 독립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한 투쟁은 정당하다. 만일 일본이 여전히 한일 양 민족의 구원한 이익과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무시하고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를 계속 점유하면 우리 민족에게는 오직 최후의 혈전이 있을 뿐이다고 하여 한국의 독립 투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그를 위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ⅰ. 김도유(2006), 백암 박은식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동국대학교
ⅱ. 김용달(2003), 안창호와 박은식의 민족운동론, 도산학회
ⅲ. 김기승(2010), 박은식의 민족과 세계 인식, 고려사학회
ⅳ. 우남숙(2008), 사회진화론과 한국 근대민족주의 :박은식을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ⅴ. 장재천(2010), 박은식의 민족자강 교육의식, 용인대학교
ⅵ. 최순영(2010), 백암 박은식의 근대사 인식과 역사교육론, 계명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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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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