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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선][불교][선][불교 선과 화엄][불교 선과 신론][돈오돈수]불교 선(禪)과 화엄, 불교 선(禪)과 신론, 불교 선(禪)과 돈오돈수, 불교 선(禪)과 위빠사나, 불교 선(禪)과 스트레스, 불교 선(禪)과 수묵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불교 선(禪)과 화엄

Ⅲ. 불교 선(禪)과 신론

Ⅳ. 불교 선(禪)과 돈오돈수

Ⅴ. 불교 선(禪)과 위빠사나

Ⅵ. 불교 선(禪)과 스트레스

Ⅶ. 불교 선(禪)과 수묵화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而知之). 자연히 하늘에서 내려진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배움이 있으면 이를 얻을 수 있으니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하여 가슴속 먼지를 털면(讀萬券書 行萬里路 胸中脫塵濁) 저절로 언덕과 골짜기 산수가 마음에 깃들 것이니 그 윤곽이 성립한다면, 그 때 손 따라 그려내는 것이 모두 신기(神氣)를 전하는 산수가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송대 곽약허(郭若虛)의 〈기운비사생지설(氣韻非師生知說)〉을 수정, 절충하는 입장이지만 이 양자는 공히 사의성(寫意性)을 내포한 기운(氣韻)을 마음으로, 그리고 직접체험으로 깨닫는 것이지 말로 전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불입문자(不入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禪)의 전법(傳法)과 상통하며, 가슴속의 먼지, 즉 세속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일이 화도(畵道)에 있어서나 선(禪)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동기창(董其昌)의 예술사상은 평담(平淡)과 질박(質朴), 천진(天眞)과 자연을 종지(宗旨)로 하는데 이는 절대순수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같은 마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마음이라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린 백지같은 마음, 아무것도 없으면서(眞空) 무엇이든지 있을 수 있는 가능성(妙有), 그것이 공으로서의 무가 갖는 뜻이라 하겠다.
당대의 명서예가이자 문인화론을 주창했던 황산곡(黃山谷)은 그림의 형상이나 시에서 보인 사물들이 의탁의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도진사화묵죽서(道臻師畵墨竹序)》에서는,
무릇 마음이 외물에 얽매이지 않으면, 그 천부적인 것을 온전히 보존하게 되며 만물의 모든 본래 모습들이 한 거울로 나타난다. 그러하니 어찌해서 먹을 묻히고 붓을 핥아 한가한 연후에 그리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진이 붓에서 기묘함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마음에서 기묘함을 터득해야 한다.
라고 하였으며, 《계륵집(鷄肋集)》 권 32에서는
크고 작은 것은 오직 마음에 있지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졸(巧拙)은 정신에 있지 손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당시의 문인화가 갖는 극단적인 사의(寫意) 중심이론을 말하였다. 또한 형호(荊浩)의 《필법기(筆法記)》중 심수필운(心隨筆運)에서
형상을 취함에 있어 미혹됨이 없어야 하고, 삭제하고 제거한 요체이며 생각을 집중하여 물상의 형을 이루는 것.
이라는 사상과도 일치된다. 또한 『필진도(筆陳圖)』중 운사휘호(運思揮毫)에 있어서는 생각이 앞이 되고 필이 뒤가 되는 자는 승리한다.
는 의재필선(意在筆先)의 사상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누구보다도 높은 경지에서 선화론(禪畵論)을 전개한 석도(石濤)는 《석도화보(石濤畵譜)》 제1장 1절에서
대저 회화란 마음에서 우러나온 생각을 좇아서 표현하는 것이다. 산천(山川)과 인물의 수려함이 잘 조화된 것과 초목조수(草木鳥獸)의 성정과 연못가의 정자와 누대의 법도(法度)를 곡진한 진리에 깊이 들어가 연구할 수가 없다면 마침내 위대한 법도를 터득할 수가 없다.
고 하여 회화란 마음으로 천지만물의 법을 표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사의정신(寫意精神)은 결국 작가가 대상의 정신과 교응(交應)한 후 자신의 마음에 비친 상(本質)을 찾는 선(禪)과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외형의 물상에 얼매이기보다는 자유로운 심상의 표현에 중점을 두어서 자연히 세기(細技)의 북화(北畵)와는 달리 사의적인 표현법을 사용하게 된 남화(南畵), 즉 문인화(文人畵)는 가장 개성적이며 독창적으로 주관적 자아를 표현한다.
이 같은 의경(意境)의 표현에 자유자재하여 정신과 기법의 일치를 이루려면 인격수양과 함께 체험이 따라야 하는데, 석도는 《화어록(畵語錄)》에서,
지식에 얽매이면 넓게 발전하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무법(無法)에 이르게 된다. 무법(無法)이 유법(有法)이 되는 것은 모름지기 법(法)에 이르는 것이다. 대개 유법에는 반드시 변화가 있고 변화가 있은 후에는 무법이 된다.
라고 하여, 화자의 이러한 개오(開悟)를 기다리는 긴긴 소요(逍遙)와 상념의 시간들은 우주의 무한한 창공을 가로지르며 나는 자유분방한 창조의 해탈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곧 선자(禪者)가 열반(涅槃)에 이르는 수행과정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Ⅷ. 결론
선을 과연 불교가 부를 수 있을까? 선학의 형성에 노장·화엄·공관 철학 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아닌가. 선종이 불교학적 분석을 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에서 절대 주체의 원점을 찾을 때 그것은 이윽고 생명이 흘러넘치는 대로 끝없이 모든 문화면에 침투하게 된다. 범부이든, 문인이든, 철학자이던 간에 모두 그 밑에서 깨달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말초적인 논의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여 덮어놓고 인간 존재의 기저를 파 내려간 선은 이리하여 중국 문화의 중요한 담당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禪文化’의 창조일 뿐 아니라, 어떠한 종교와 사상도 불태울 것 같은 인내심을 갖고 사회적 병리의 치유자·개혁자가 될 수 있다는 커다란 기대를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 기구와 역사 현상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꾀하지 않는 선은 그 현실 돌파의 방법이 당연히 단조로운 외길이 될 수밖에 없으며 개개의 구체적 事象의 전후좌우를 정확히 관통하는 식견이 결여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하나의 역사적 현실의 기구와 조직을 성의껏 조사하는 분석적 지식도 필요하지 않은가, 선종에 있어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선심 그 자체가 분석할 수 없는 총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답을 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 ‘宋代 儒學’이다. 여기서 본래성과 현실성의 관련이 재검토 되고 재구성된 후 유교 노선은 완전히 불교 노선을 능가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김대열, 선종의 공안과 수묵화 출현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교육학회, 2010
강건기, 위빠사나 선과 정신건강,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1999
강건기 외 1명, 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 : 돈점논쟁의 역사와 현재, 민족사, 1992
오지수, 선에 관한 기독교적 이해, 침례신학대학교, 1989
한기두, 스트레스와 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1997
황규찬, 중국과 한국에서의 화엄과 선의 교섭, 동국대학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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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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