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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불교 선(禪), 정혜불이, 화엄, 원각경, 인간존재, 정신겅강]불교 선(禪)과 정혜불이, 불교 선(禪)과 화엄, 불교 선(禪)과 원각경, 불교 선(禪)과 인간존재, 불교 선(禪)과 정신건강, 원불교 선(禪)과 성품오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불교 선(禪)과 정혜불이

Ⅱ. 불교 선(禪)과 화엄

Ⅲ. 불교 선(禪)과 원각경

Ⅳ. 불교 선(禪)과 인간존재

Ⅴ. 불교 선(禪)과 정신건강

Ⅵ. 원불교 선(禪)과 성품오득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도 차이점이 보인다. 정신분석의 境遇 치료자는 대담자로 하여금 자유스럽게 聯想을 하도록 해준 다음, 그 聯想에 대해 해석을 가함으로써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핵심적인 動機나 感情을 대담자로 하여금 洞察하도록 해준다. 그래서 치료자 혹은 분석가의 役割은 治療에 있어서 핵심적 要素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위빠사나 禪의 수행자는 自身의 문제를 스스로 發見하고 解決하는 立場에 있다. 위빠사나 禪의 스승은 수행자에게 修行의 原則과 方向을 提示해주는 보조적인 立場에 있다. 本質的으로 위빠사나 禪은 스스로 하는 능동적 修行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절대적인 立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案內者일 따름이다. 위빠사나 禪은 수행자가 觀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一種의 자기분석의 길이다.
이상의 차이점들을 생각해 볼 때, 위빠사나 禪에서 恒常 自身을 분석하고 觀察하는 수행법은 정신분석의 外延을 넓히고 內容을 深化시키기 위해서도 注目할 만한 것이라 생각된다. 정신분석이 症狀의 治療뿐 아니라 적극적인 目標, 즉, 平安한 狀態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局部的이고 한시적인 分析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Ⅵ. 원불교 선(禪)과 성품오득
선이 한갓 번뇌를 끊고 일심을 만드는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것도 또한 한갓 업장을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보기 시작하여 이미 선종에서는 이오위즉(以悟爲卽)이라고 보아 왔다. 일찍이 지눌(知訥 1158-1210)은 그의 수심경에서 이오이수(以悟爲修)해야만 점문열기(漸門劣機)의 오렴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깨쳐야만 대승선에 또는 여래선에 든다고 강조하다 보면 선은 어려운 것이요 현실과 멀리 떨어진 법이 됨으로 중생들과 거리가 먼 수행길이 되고 만다.
그러나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래를 회상해 돌아가자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자기본가에서 살던 사람이 외지에 가서 활동하고 나서 해가 저물면 제각기 자기 집을 찾아 돌아가는 것처럼, 누구나 자기집 찾는 것은 본능이요, 자연이다.(그러나 자기집을 못 찾아 헤매는 미아가 많이 생기는 것이 문제이다) 어떻게 자기집 찾는 것을 어렵다 할 것인가. 우리 본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소태산대종사는 초기교단의 심통제자 십 여 명이 언답을 막고 나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자 일은 몸으로 성심껏 노력하면 되지만 깨닫는 길은 참으로 어려워서 어떻게 할지 엄두가 안난다는 제자들의 말씀을 듣고 소태산은 깨닫는 길이야 말로 알고 보면 코풀기보다 쉽다고 제자들에게 단언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말이다.
이렇게 쉬운 것이지만 꼭 깨닫지 아니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자성을 깨닫지 아니하고서 수행을 하는 것은 오렴수요, 무승자박(無繩自縛)이 되므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견성을 해야 된다. 그러므로 견성을 하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의단(疑端)이 끊어지지 아니하며 어디에 사로잡혀 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견성해야만 수행의 방향이 서진다.
견성의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우두계(牛頭系)의 육조(六祖)라하는 혜충(慧忠 683-769)이 자주 써왔다는 점에서 혜능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혜능에 와서 입장은 분명히 되었다. 혜능 이전에 천태계에서 관(觀)을 써왔고 북종계에서 간(看)을 썼으나 신회와 더불어 혜능은 견(見)으로 성품을 분명히 이해하게 한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즉 능관(能觀), 소관등(所觀等) 주객이분의 분화에 대한 비판으로 주객이분 되어 보는 것이 견이 되는 견성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심결에 견성은 마치 자기눈을 자기가 볼 수 없듯이 물건은 잘 보이나 자기 눈만은 안보이는 것을 알아 다시 보려고 하는 욕심이 없어지면 곧 견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견성은 어떻게 하는 것이가? 혜능의 단경에서 찾아보자.
① 자성본래가 청정한 것을 보는 것 - (菩薩戒經云 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
② 진, 망을 다 놓아 버리고 평등한 상태에 이르는 것 - (當生般若 除眞除 妄卽見佛性)
③ 지혜관조로 모든 법에 취하지도 않고 사하지도 않는 평등한 상태를 견성이라 한다. - (以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
④ 자심이 바로서서 번뇌와 진노가 정견속에 물들지 아니하면 견성이다. - (不執外修 但於自心 常起正見 煩惱塵勞 常不能染 卽是見性)
⑤ 깨달은 사람은 보리 열반, 해탈, 등을 세우지 않고 또한 법도 얻었다 할 바 없으되 능히 만법을 건립한다. - (若悟自性 亦不立菩提 涅槃 亦不立解脫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萬法 是眞見性)
⑥ 견성한 사람은 내세워도 얻고 안내세워도 얻어서 거래에 자유하여 걸리고 막히지 않는다. - (見性之人 立亦得 不立亦得 去來自由 無滯無碍)
이외로도 많이 있으나 이상의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 내용을 다시 다음 몇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본무번뇌 본자청정 본래평등 본래무염 본자연, 본개방, 본자유(本無煩惱 本自淸靜 本來平等 本來無染 本自然, 本開放, 本自由)의 상태를 똑바로 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견성만 하게 되면 일체가 자연히 밝아지고 열려진다고 보았다. 조계별전(曹溪別傳)에 보면, 인종(印宗)법사가 혜능이 정사임을 알아보고 혜능은 홍인에게서 무슨 법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한다. 혜능은 홍인에게서 견성에 대한 말씀은 들었으나 선정이니 해탈이니 무위이니 무루법이니 하는 말은 듣지 아니했다(唯論見性, 不論禪定, 解脫, 無爲, 無漏法)는 것이다. 이토록 견성을 기초로 하는 것은 마음의 본래를 알면 망상이 불생한다(마조어록)는 입장에 이른다. 그러므로 견성만이 바른 수행이 되고 견성만이 마음의 안정과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참고문헌
ⅰ. 김석암(2007), 선사상과 현대인의 자기계발, 한국불교학회
ⅱ. 서재영(2009), 선의 생명평등 사상과 수행문화, 한국선학회
ⅲ. 이찬훈(2008), 선과 화엄사상 회통의 현대적 의미, 대동철학회
ⅳ. 이희용(1999), 원각경의 수행체계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ⅴ. 이이화(2002), 불교 속에 드러난 인간존재의 길, 중국철학회
ⅵ. 지효(2005), 선과 정신분석 : 정신건강에 도움을 주는 명상, 동국대학교 석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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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2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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