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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 국제화,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 정당화,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역사화, 대중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국제화

Ⅲ.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조직화

Ⅳ.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당화

Ⅴ.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민주화

Ⅵ.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화

Ⅶ.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도시화

Ⅷ. 5 18광주민주항쟁(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대중화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가톨릭센타, 남동, 임동, 학운동 성당에서 있었던 테이프 상영은 연인원 20여만 명이 관람을 했다. 물론 당국도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시기는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군부가 ‘내란음모’, ‘폭도’, ‘무장난동’ 등으로 낙인찍어, 광주가 타 지역으로부터 고립감을 느끼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에 이러한 영상물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처했던 집단적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광주항쟁 당시의 자료는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광주 다큐멘터리들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자료들을 전문 기자재도, 기술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편집했기 때문에 화질이 고르지 못하다. 화면은 몇 분 간격으로 흔들리고, 원래 비디오테이프의 색채가 탈색돼 흑백으로 ‘전환된’ 장면들이 계속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화질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물들은 필름을 통한 ‘기록’과 ‘전달’ 그리고 ‘폭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는 없었다. 현장필름은 “당시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를 기록하고 보여주기는 하지만, 기록 대상 사건이 갖는 의미 그리고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갖는 관계를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논리적인 설명이나 해설에는 한계가 있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고양되는 시기에 이르면 이러한 현장필름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적인 방송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고 방영되기 시작한다.
Ⅸ. 결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판 과정이 진행되는 분위기에서 이 시기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은 좀더 사실성을 추구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의 재구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또한 518에 대한 수정된 인식이 어느 정도 확산됐다는 판단 아래, 이전의 단순 ‘폭로성 다큐멘터리’를 지양하고 대신 해결책과 역사적 기억에 대한 의미 복원에 무게를 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MBC 내부 사정은 KBS와 별반 다를 바 없었으나, 이 시기의 자기반성 과정을 비교적 빨리 마무리한 편이었다. 그 결과가 1996년 5월 14일, 50분간 방송된 MBC PD수첩: 80년 5월 그때의 언론은 죽었다였다. 이 텍스트는 일종의 언론의 자기비판 프로그램이었다. 그 자체가 다큐멘터리이기도 한 이 프로그램에서는 관련자 인터뷰, 사진 및 관련 영상물이 해설자의 나레이션에 첨부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80년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광주의 언론기관을 찾아가 당시 신군부에 의해 기사가 압류당했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간략 기사만 기재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하는 역할을 다하지 못한 언론사의 각성을 촉구하는 자기반성의 목소리였다.
MBC 교양제작국에서 제작하는 뉴스 매거진 형태인 MBC PD수첩에서는 광주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었다. 90년 5월 14일에서 19일까지의 광주 모습을 취재하여 90년 5월 22일 방송된 37분 분량의 MBC PD수첩: 90년 5월 광주는 일년에 한 번씩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5월 광주가 남아 있음을 시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같은 해 방송된 MBC 리포트, 광주는 치유되었는가?는 광주항쟁 희생자에 대한 최초 보상이 이루어진 90년 당시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희생자에 대해 최초의 보상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라 “광주의 한, 아들의 죽음이 돈으로 흥정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광주문제의 해결이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 아픔을 같이 하고 나눔으로써 화해와 단결을 이룩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1996년 5월에 KBS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망월동은 이 시기의 변화된 양상을 잘 반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전 다큐멘터리들과는 달리 당시 사건의 영상자료는 최대한 줄이는 대신 2개월 동안 망월동을 찾은 참배객들과 유족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는 518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함께 다룸으로써, 망월동의 의미를 투쟁의 구심점으로 부여한다. 그래서 망월동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여전히 “산 자”의 문제임을 보여줌으로써 “아직 광주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변화된 양상은 지역방송국에서 다양한 형식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된다는 점이다. 광주MBC에서 1996년과 1997년에 각각 제작한 시민군 윤상원과 밀항 탈출은 인물 탐구 형식을 취한 ‘다큐드라마’이다. 이 두 다큐멘터리는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한 시민군을 대표하는 윤상원과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이라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518에 참여한 항쟁 주체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동시에 이들의 삶을 기리려는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두 편의 다큐드라마 대본은 당시 항쟁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으며 극단 ‘토박이’ 대표였던 박효선 씨가 맡았는데, 시민군 윤상원에서는 주연인 윤상원 역까지 직접 맡아 메시지 전달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새롭게 개국한 광주방송(KBC)은 1996년 5월 17일에 창사특집극 2부작 아 광주여를 처음으로 방송한다. 제1부 “16년만의 만남”은 1980년 당시 광주 진압에 동원됐던 이성우 씨가 제대 후 대인공포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10년 동안 정신적 갈등을 겪어오다 눈물로 참회하는 내용이다. 제2부는 하와이에서 열린 아시아학회의 518분과에서 논의된 교수들의 시각을 들어보고, 당시에 관심을 모았던 미국측에 대한 공개사과 요구 주장 등도 보도했다. 또한 광주전남과 타 지역 주민 1,4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그리고 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518에 대한 시각 등을 살펴보고 있다.
참고문헌
◈ 김재균, 5.18과 한국정치, 에코미디어, 2010
◈ 마나베 유코 저, 김영택 역, 광주항쟁으로 읽는 현대한국, 사회문화원, 2001
◈ 정동섭, 5.18 광주사태, 풀빛, 1995
◈ 최영태, 5.18 그리고 역사, 길, 2008
◈ 학술단체협의회, 5.18은 끝났는가, 푸른숲, 1999
◈ 황석영, 5.18 그 삶과 죽음의 기록, 풀빛,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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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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