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대아시아주의]일본의 대아시아주의, 일본의 아시아패권주의, 일본의 아시아중시주의, 일본의 국가주의(국가중심주의), 일본의 지역주의, 일본의 반공주의, 일본의 경제중심주의, 일본의 친영주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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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아시아주의]일본의 대아시아주의, 일본의 아시아패권주의, 일본의 아시아중시주의, 일본의 국가주의(국가중심주의), 일본의 지역주의, 일본의 반공주의, 일본의 경제중심주의, 일본의 친영주의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일본의 대아시아주의

Ⅱ. 일본의 아시아패권주의

Ⅲ. 일본의 아시아중시주의

Ⅳ. 일본의 국가주의(국가중심주의)

Ⅴ. 일본의 지역주의

Ⅵ. 일본의 반공주의

Ⅶ. 일본의 경제중심주의

Ⅷ. 일본의 친영주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선택은, 전쟁대평화, 독재대민주주의, 착취대생활향상 등과 같은 가치관상의 대결에서는 벌써 없어졌다. 보수세력은 프레(pre) 고도 경제 성장기의 공공성이라고 적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히려 「평화민주주의생활향상」에 새로운 특정한 형태를 담게 된 것이다.
고도 성장형의 공공성의 유형을 정리해 보자. 그것은, 프레(pre) 고도 경제 성장형 「공공성」의 축소로서 특징づ 찰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전히 「평화민주주의생활향상」의 테두리는 부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평화」는 안보체제하에서의 직접 전쟁개입회피라고 하는 점까지 축소되었다. 「민주주의」는, 점점 사회적【시티즌싯푸】(social citizenship)보다도 자유권적권리의 범위내에 억지로 들어가져, 「생활향상」은 기업에 소속해서 회사인간이 되어서 돈을 따라 많이 벌이에 축소되었다.
Ⅷ. 일본의 친영주의
친영주의의 또 다른 세력은 와세다 대학의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를 중심으로 하는 와세다 파로, 이들은 독일프랑스의 과격성을 배척하고 영국식의 온건한 점진주의를 표방하였다. 영국 유학생들도 친영주의의 뿌리를 내리는 데 기여하였다. 후쿠자와의 착상으로 2차 제국대학 유학생 10명 가운데 8명이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의 영향은 산업, 은행, 조선업, 그리고 특히 해군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러일전쟁의 승리자 도오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1871년부터 7년간 영국에서 유학했는데 그는 특히 넬슨 제독을 열렬히 흠모하여, 실제로 도오고의 전술을 연구해 보면 그가 넬슨의 전술을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해군도 거의 전적으로 영국인들에 의해 개혁되고 훈련되었기 때문에 영국이 일본 해군을 자신들의 지지 세력의 마지막 보루로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영국을 다녀 온 모든 사람들이 친영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얼마간 지낸 후 귀국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明)는 보불전쟁에서 완승한 독일 군대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영국 의회는 그렇지 못했고 그 인상이 일생 야마가타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였다.
일본에서 서양에 대한 열정이 최고에 달했을 때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어를 영어로 대체할 것, 그리고 천황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설득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일본 전체가 서구화의 열병에 들떠 있는 가운데 문명개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적응도 놀랄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모든 것이 “인민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아내를 파는 것조차 역시 자유니라”라는 말이 통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은 얼마 후 자유가 지나치다는 명목 하에 정부가 전통적 도덕 교육을 부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신구 세대들간의, 혹은 서구화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의 간격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플록 코트를 입은 지금의 일본인”은 “기모노를 입은 옛날의 일본”을 서양인들보다 더 낯설어 한다고 관찰한 동경 제국대학 영문학 교수 배질 챔벌린(Basil Chamberlain) 같은 이는 예전의 일본이 급속히 사라져 가는 것을 슬퍼하였다.
일본인들은 후쿠자와의 ‘탈아입구’론이 보여주듯이 타자로서의 아시아를 설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자 하였으며 일부는 스스로를 ‘명예 백인’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메이지유신 이래 가장 과격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서구주의자는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였다. 도쿠토미는 일본의 전통을 철저히 부정하고 일본에 진보적인 서양 사회를 건설하려 한 열정적 서구주의자였다. 그는 1886년 서구주의자들의 단체인 <民友社(민유샤)>를 조직하고 다음 해 <<國民之友>>를 발간하여 청년층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서양 문물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전통적 도덕을 보존하자는 주장에 대해 도쿠토미는 어떻게 “나폴레옹 법전을 채택하면서 동시에 유교적 윤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였다. <<國民之友>>의 창간은 일본에서 ‘국민’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國民之友>>를 통해 그전까지 사용되던 정부의 공식 용어인 ‘신민’을 대신하여 ‘국민’이라는 단어가 점차 정착하기 시작하여 사회 전반에 침투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근대화의 모델로 서구를 상정한 점에서는 도쿠토미와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어느 정도 빌릴 것인가였고 여기서 견해가 갈렸던 것이다. 대부분의 주장이 일본의 제도와 기술, 가치들의 수정에 그쳤다면, 도쿠토미는 그것들을 전적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면서 서구화의 과정에서 일체의 중용과 타협을 거부하였다. 도쿠토미의 확신은 서양 문명이 보편적 발전의 길이며, 선진 유럽 국가들의 역사는 후진국들이 나아갈 길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었다. 물론 전적인 서구주의가 함의하는 것에 혼란을 느끼고 일본 문화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 미야케 세츄레이(三宅雪嶺) 등은 1888년 <民友社>에 대비되는 단체인 <政敎社(세이쿄샤)>를 구성하고 <<國民之友>>에 대항하는 잡지 <<日本人>>을 창간하여 국수주의(國粹主義) 입장에서 피상적인 서구주의를 비판하고 메이지 사상계에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내었다. 이들은 유럽 국가들이 일반적인 산업화와 민주주의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민족성의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國民之友>>가 ‘국민’이라는 개념을 퍼뜨렸다면, <政敎社>의 기관지인 <<日本人>>과 <<日本>>은 ‘민족’이라는 용어가 퍼져 나가는 수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 강창일, 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 우익낭인의 행동과 사상을 중심으로, 역사비평사, 2003
- 강명세, 하토야마 정부의 독도 정책과 \'아시아 중시\' 외교, 세종연구소, 2010
- 김미숙, 일본 근대 국가주의와 젠더이데올로기 형성에 관한 사회학적 소고, 청주대학교, 2008
- 신용하, 일본의 아시아패권주의 정책을 경계한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1994
- 진창수, 일본의 대외경제정책 : 일본의 아시아로의 복귀, 신아시아연구소, 2005
- 최태육, 동아시아 지역주의에 대한 일본 정책의 변화,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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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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