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 약력,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제와 부석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교민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병인의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한독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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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 약력,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제와 부석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교민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병인의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한독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회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약력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제와 부석제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교민단
1. 결성과정
2. 조직체제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병인의용대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한독당)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회담
1. 6개항 의견서
2. 2월서신
1) 김일성에게 보낸 것
2) 김두봉에게 보낸 것
3. 7거두성명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우선 주체 ‘7거두’이다. 이들은 대부분 임시정부 요인들이며, 특히 김구김창숙조소앙조성환조완구 등은 임정법통론을 주장하던 핵심 지도자였다. 다음, 성명은 민족자주적 입장을 기본철학으로 하고 있으며, 한국현대사에서 처음으로 통일운동 조직을 탄생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이 성명을 토대로 임정의 법통을 이은 국민의회와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연합단체인 민족자주연맹이 연합하여 4월 3일 ‘統一獨立運動者協議會’가 결성되었다. 여기서 “통일 독립”이란 표현은 민족 자주적 관점에서 통일운동의 이념을 요약한 것으로, 7거두서명의 기본 철학을 이은 것이며, 또한 이후 남한민족주의자들의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계승되었다.
Ⅸ. 결론
상해와 남경이 위기에 처한 가운데 중국 국민정부는 1937년 11월 17일 수도를 남경에서 중경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 군정의 수뇌부는 무한(무창한구)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항전체제를 갖추었다. 그들은 특히 민중을 항일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1938년 2월 무한에서 중국군사위원회 산하에 정치부를 설치하였다. 정치부 부장으로는 국공합작파이자 항전파였던 진성이, 부부장에는 중국공산당을 대표한 주은래와 중간파 황기상이 추대되었고 정치부 제123청 가운데 제3청의 청장은 국공합작파 문화인 곽말약이 임명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정치부 제3청은 사실상 中共의 통일전선공작의 거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는 제2차 국공합작 체제의 소산이자 상징적 존재였다.
일본군은 1938년 6월에는 전시 수도 무한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중일전쟁 발발 이래 최대 규모인 12개 사단을 동원하여 동과 북에서 무한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위기에 놓였던 무한에서 국공합작 체제는 원활하게 작동되었다. 나아가 국민정부는 일본군에 저항하기 위해 한인 및 일본인 좌파 세력도 끌어들여 중용하였다. 일본인 공산주의자로 1938년 3월 무한으로 들어온 녹지선 부부는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제7처의 고문을 맡았고, 역시 일본 공산주의자인 청산화부는 1938년 6월 무한에 들어와 장개석의 정보 고문이 되었다. 한인 좌파 청년(민혁당원과 전위동맹원)들은 정치부의 적극적인 원조(사실상 産婆) 하에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를 건립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휘하에 소속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지도했던 지도위원회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인원과 민혁당해방동맹혁명자연맹 등 한인 좌파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민혁당 당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장을 맡았다. 한편 의용대의 정치적 노선을 앞장서 이끌어 가는 정치조장에는 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제1대)과 전위동맹을 대표했던 김학무(제2대)가 맡았다. 반면 한인 우파 세력은 중일전쟁 발발 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이하 광복진선)라는 연합기구를 발족시켰으나 초기에는 중일전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특히 1938년 5월 김구가 내부인사에 의해 피격 당한 장사사건이 말해주듯이 내분까지 겹쳤던 것이다.
국공합작체제가 원활하게 유지되는 정세 하에서 민혁당 등 좌파세력은 중국 당국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인 우파 청년단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 나월환 등이 1939년 말 화북 진출을 위한 자금 지원을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측에게 요청하자 정치부는 이 문제 처리를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에 맡겼다.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에서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먼저 조선의용대에 가입해야 한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하였다. 지도위원회는 특히 화북의 한인을 항일전에 동원시킬 단체로는 조선의용대가 “합법적이며 이상적인 단체”라고 주장하였다.
또 당시까지 중국 당국은 우파 한인측의 임정승인 요청이나 군대 건립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西安의 중국군 제34집단군 사령 호종남은 1940년 2월 15일 이전 어느 시점에 장개석에게 중국 境內에서 “조선군”을 창설하자고 건의하였다. 호종남은 아울러 한인의 임시정부 건립을 허가하여 한인들로 하여금 광복의식을 갖도록 하며 ‘우리’(국민정부-필자)의 소리를 세계에 알리자고 건의하였다. 호종남이 임정 건립의 허락과 조선군 건립을 주장하고 나온 점에서 볼 때 胡宗南의 건의는 1939년 말부터 서안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던 우파 한인 측의 요청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종남 안을 검토한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는 임정 수뇌 인물 선택이 어렵다거나 한인 당파간의 분열 등의 이유를 들어 임정 건립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또 한인의 윤함구(화북 일본군 후방지역-필자)와 東北 파견은 현재 정치부가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전선공작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 의용대를 강화해 그 공작을 담당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군 건립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이처럼 안정된 위치에 있었을 때 민혁당을 비롯한 좌파는 임정에 가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점은 관내지방 좌우 7개 당파가 모여 개최한 기강통일회의에서 알 수 있다. 민혁당은 기강통일회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임정으로의 통일에는 반대하였다. 1939년 8~9월 기강회의 때 우파 측에서는 “임시정부는 3.1운동 때 상해에서의 전국대표자대회에 의해 구성되어 혁명 역사상의 의의”가 있고 “국내 동포와 해외동포들이 이 조직을 잘 알고 적극 옹호”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을 민족 최고 영도기구로 해야 하며, 아울러 조선의용대는 임정의 통솔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민혁당은 임정 봉대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강만길 교수에 따르면 임시정부를 奉戴하느냐 여부는 기강회의가 실패로 끝난 3가지 요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참고문헌
◇ 김지암(2007),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각 당파의 관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 신용하(199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에서의 위치, 민족통일촉진회
◇ 이근백(199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과정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 이현희(1983),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정통성문제 검토, 청계사학회
◇ 이현희(1998),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관계, 모럴하우스
◇ 황상현(1988),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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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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