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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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모택동은 자신감을 얻었다.
-대약진
-인민공사
-유소기와 등소평의 조정정책.

문화대혁명의 경과

문화대혁명의 구성 요소
- 혁명이란 무엇인가?
- 무엇이 문화대혁명을 확산시켰는가?
\"- 문혁에 대해 찬성하시는 건가요?
- 문화대혁명의 이념
- 문화대혁명의 주된 동력
- 문화대혁명의 결과

대중과 혁명

문화 대혁명은‘단지’잃어버린 10년일까?

문화대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1) 역사적 실험으로서의 문화대혁명
2) 함량미달의 혁명
3) 탄핵과 문화대혁명 -‘대중’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화대혁명은 프롤레타리아(pt)계급의 계급투쟁이었으며, 국가독재에서 pt독재로의 이행을 위해 일으킨 혁명이었다.
pt독재로의 이행은 20세기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서 이룩된 적이 없었다. 스탈린과 프랑스공산당을 비롯한 수많은 공산당의 pt독재노선의 폐기는 20세기 계급투쟁이 패배하리라는 것을 사실상으로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아니, pt독재라는 모델은 결단코 한 번도 실험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든 실제로 실현가능한 그 무엇이든, 문화대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pt독재―어떤 형태이든―에 대한 거의 최초의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혁명노선에 대한 신기원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련이나, 사회주의 동구권의 예와 비교해 본다면, 문혁은 계급투쟁이후의 계급투쟁, 즉, bg계급과 pt계급사이의 단 한 번의 혁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계속되는 영속혁명의 개념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말 그대로 혁명속의 혁명이었다.
2) 함량미달의 혁명
문화대혁명은 대중의 자생성에 대한 과도한 신념, 혹은 대중의 자생성에 대한 편향 속에서 진행되었다. 의식성을 제대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획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 단순히 모택동 어록을 읽는 것만으로 만족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갖는 문제점이다. 투쟁과 투쟁의 언어를 민중의 언어와 실천으로 돌려줘야할 의무를 유기한 것은 모택동과 문화혁명의 초동주체이자 전위부대인 홍위병의 잘못이다. 이러한 혁명과정중의 자생성의 편향은 궁극적으로 문화대혁명이 ‘함량미달’의 혁명임을 입증해주는 근거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민중적 관점에서나, 이론적 측면에서나 ‘미완의 혁명’이라는 혐의를 씻어내기 힘들 것이다.
3) 탄핵과 문화대혁명 -‘대중’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탄핵과 문화대혁명은 그 성격과 결과가 같지 않음에도 우리가 이 양자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대중 운동적 함의와 앞서 제시한 자생성과 의식성의 테제 속에서 이 양자가 공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핵으로 표출된 대중들의 분노를,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계급동맹을 보다 강고히 구축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자생성에 대한 의식성의 우위는 이것으로 증명된다. 부안에서의 주민투표 또한 이를 반영한다. 정부는 주민투표의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애써 그 의미를 축소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주민들은 그것에 애써 법적 효력을 두려 하지 않았다. 부안 주민들은 ‘정치적 효력’을 갖는 주민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핵 폐기장과 관련된 의견을 모아내기 위한 것으로 주민투표를 이해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그것은 법적 효력으로 제한하고 체제 내로 구성할 수 없는 정치적인 운동이었다. 이것이 대중(운동)들의 역동적인 가능성이다.
문혁은 당시의 민중과 대중이 가졌던 불만과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다. 홍위병이 모택동에 의해 조직되었건 아니건 간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대중이 어떠한 정치적 의사와 어떠한 전위분파에 의해 움직이고, 다시금 대중이 혁명의 목적의식성을 재전유하는가?의 문제다.
탄핵시기 전체대중운동이 겪어야만 했던 황당함은 대중전체의 폭발하는 분노, 그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인식의 공백속에서 우왕좌왕했던 것이다. ‘민중탄핵론’, ‘총선심판론’, ‘비국가민주주의’, ‘우익의 테러’ 등의 혼란 속에서 전체대중운동은 광화문에 운집한 30만 대중 앞에서 어쩔 바를 몰랐다. 위에서 열거한 입장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은 지면상 곤란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도대체 30만대중이란 무엇 인가?라는 질문이다. 30만 대중 모두가 노무현의 홍위병이란 말인가? 아니면, 한나라당에 대한 범국민적 반대세력의 결집인가? 결국 결과적으로 탄핵시기 전체대중운동의 혼란은 총선시기에 ‘열우당 압승’의 결과를 노정했다.
대중에 관하여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혹은 진리는, 대중은 민주주의가 전면적으로 혹은 극적으로 부정되었을 때 ‘광화문에 모인다’. 단순히 탄핵이 부르주아지간의 권력다툼이며, 우리는 거기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혹은 30만대중은 ‘적이다’ 라는 황당한 모토는 종종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대중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열망한다. 대중은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주기 위해서, 혹은 ‘한나라당’을 뭉개기 위해서 광화문에 운집한 것이 아니다. ‘30만’속에는 공산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자유주의자 혹은 신자유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중요한 쟁점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동시에, 문화대혁명의 열망이 과연 모택동 개인에 대한 민중의 열망인가? 혹은 공산당지도부에 대한 불만의 외침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당시 중국민중의 열망이 비록 모택동 개인과 홍위병에 의해 경도되었고 결국 등소평일파의 권력 장악으로 막을 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탄핵과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은 ‘민주주의’와 ‘계급투쟁’에 대한 민중의 항시적 열망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참고문헌
모택동선집(朝鮮文), 연변, 民族出版社, 1970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대혁명 - 평등 지향의 민중 혁명을 중심으로- 김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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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낮은 중국, 라오웨이, 이가서, 2004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 편, 『정통중국현대사』, 허원 옮김, 서울, 사계절,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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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오쿠무라 사토시 저, 박선영 역, 소나무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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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25
  • 저작시기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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