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기 통일인식과 민족국가 성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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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전후기 통일인식과 민족국가 성립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해방전후기 통일인식과 민족국가 성립론


Ⅰ. <이승만의 건국이상>
1. 머리말
2. 사상형성의 배경
3.기독교국가의 건설
4. 민주공화제 정부 수립
5. 反共보루의 구축
6. 평등사회의 실현
7. 문명부강의 달성
8.맺음말

Ⅱ.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국가상>
1. 머리말
2.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
3. 안재홍의 국가건설활동
4. 맺는말

Ⅲ. <박헌영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운동>
1. 문제의 제기
2.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
(1)시대적 상황
(2)사상적 배경
3. 8월테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
(1)8월테제
(2)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
(3)이론적 분석과 노선투쟁
①이론적 분석
4.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운동
(1)정부수립 원칙
(2)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운동

5.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영은 절대다수인 근로계급의 이익을 존중하고 전국민의 안전생활을 보장하는 정부를 세워 착취와 압박이 없는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박헌영은 이러한 민주국가는 반드시 민주주의 원칙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국가만이 일제잔재를 숙청하며, 민족의 정치·경제·문화 재건에 있어 그 역사적 임무를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으로 그는 네 가지를 열거했다.
첫째, 모스크바 3상결정을 의식적으로 진정하게 지지하고, 3상결정의 의의를 민족에 성의있게 선전·교양하는 정당과 대중단체를 토대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만이 그는 파시스트반동을 근멸하고 민주주의노선으로 세계평화를 부흥시키는데 보조를 같이하며 동양평화의 확보를 위한 지주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둘째,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그리고 3상결정을 반대하다가 표변하여 지지를 표명한 집단들은 정부수립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반민주주의적이며 반민족적이고 반동적인 존재로, 국제적으로는 전쟁도발자의 대리인이고 국내적으로는 완전독립의 방해자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셋째, 정치형태는 인민속에서 발생한 것 즉 인민위원회의 형태를 취해야한다는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이후 위대한 민족적 창의로써 정치의 완전한 형태가 탄생하여 전국적으로 조직된 것이므로 인민위원회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럴 경우 민족의 자결권을 담당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계급이나 한 당파나 한 인물의 전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당파가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며, 각 계급이 다 각각 자유로운 평등한 생활과 생활의 향상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정당의 활동과 발전을 구속하는 일체의 법령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대에 뒤떨어진 한 계급의 이익이 다른 전체국민의 발전에 질곡으로 작용한 경우에는 이 뒤떨어진 계급은 해소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바로 여기에서 토지개혁으로 인한 지주의 계급적 해소와 민주주의 발전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네가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2)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운동
박헌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을 제창한 후 4개 항의 정부수립원칙을 제시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정권을 장악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에 적합한 정책을 입안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이 주도적으로 수립되었던 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의해 실체가 부인되고 공산당의 활동이 견제를 받게 됨에 따라 그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과는 거리가 먼 노선을 밟아나갔다. 현실적으로 그가 추진했던 것과 8월테제에서 제시했던 것과의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의 노선은 더욱 급진성을 띠었고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박헌영은 수세에서 공세로, 퇴각에서 진격으로 돌진하는 신전술을 채택했다. 이에따라 공산당은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리하여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바로 ‘9월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었다. 당시 미군정의 실책으로 경제적인 여건이 악화된 것이 사건발생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이에 못지않게 박헌영의 전략전술이 작용했던 것이다.
총파업이 항쟁으로 전환되면서 무장진출의 형태가 나타나자, 박헌영은 이러한 투쟁이 없었더라면 완전한 해방을 달성할 능력과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항쟁은 반동노선과 싸우며 ‘인민의 정도’를 걷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인민의 정도’라고 하는 것은 “독립민주국가의 기초를 구축하고 역사발전법칙에 순응하여 인민공화국의 정도를 걸어가고 있는 북조선의 인민노선”을 지적한 것이었다. 즉 소련군의 지도와 협조아래 북한에서 실시되었던 제반 사회주의적인 개혁조치를 모델로 하여 남한에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과는 거리가 먼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수립하려는 의도였다.
공산당·인민당·신민당 3당의 합당으로 남로당이 출범함에 따라 박헌영의 노선은 더 폭력성을 띠었다.그리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냈다.
박헌영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종국적으로는 북한식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8월테제에서 그가 제창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과는 배치되는 노선이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전개한 폭력투쟁과 무장투쟁으로 남로당은 합법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써 그의 정치노선은 총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수많은 당원과 조직 외곽단체가 계속해서 희생되고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도 프롤레타리아독재국가건설을 위한 무장투쟁 이외에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결과였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박헌영은 해방 후의 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단계로 파악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총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현실정치의 측면에서는 이와 배치되는 제반전략과 전술을 채용했다. 즉 신전술 채택 이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추진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미군정의 배제정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덧붙여 소련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마련한 대한반도정책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박헌영은 결국 활동무대를 38선 이북으로 옮겼고 이후 그의 노선은 더욱더 폭력성·과격성을 띠게 되며, 이에 동원되었던 조직들이 와해되었다.
이처럼 박헌영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이 파탄에 이르게 되면서, 우익진영은 상대적으로 그 입지를 넓혀나갔다. 미군정의 후원도 기여한 바가 컸지만 공산진영의 노선상의 모순 또한 이를 방조했기 대문이다. 이것이 해방정국의 본질이자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유영익, 이승만의 건국사상, 한국사 시민강좌17집, 1995
유병용,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국가상, 한국사시민강좌17집, 1995
심지연, 박헌영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운동, 한국사 시민강좌 17집,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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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9.23
  • 저작시기2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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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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