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 미술사 정리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근현대 미술사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전에서의 입선을 위한 강습소의 역할을 주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시기의 화숙은 동양화의 각 분양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김은호와 이상법 허백련이 운영하던 낙청헌과 청전화숙 연진화가 대표적이며 김은호의 ‘낙청헌’은 1929년경부터 동양화 지망생을 받기 시작하여 2세대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으며 이들 문하생들끼리 숙전인 후소회를 조직하여 전시를 개최하기도 한다. 또한 1930년경부터 문하생을 받은 이상범의 청전화숙의 문하생들은 이상범을 통해 충실히 배운 수묵사경화풍으로 조선미전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청전류’화가로 분류되기도 했으며 후소회처럼 동문전시회인 ‘청전화숙전을 3회 열었다,
한국적미술의 이론적 모색
모더니즘 미술론의 증진
객관주의적 근대에서 주관주의적 근대로의 '개조'를 모색하며 대두되었던 신흥미술의 약진과 전의 미술로의 진화와 더불어 미술비평에 모더니즘 작가들이 많이 참여하면서 창작의 주관성과 표현 방법으로서의 모더니즘 미술론이 증진 되었는데 순수성의 입장에서 예술의 무기화를 주장하는 계급적 사회주의 미술론을 반대하는 성향을 가지면서 사생적 리얼리즘의 관전풍에 대해 자연의 외면 재현이며 객관세계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환쟁이 미술'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과 무 목적성을 강조하거나 가치론과 표현 방법으로서의 조형론적 측면에서 주로 언술되었다. 즉 프로예술론과 아카데미즘에 대한 반항과 거부 즉 역사적 모더니즘으로서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한국미술의 특질론
1920년대 초에 이미 일본의 미적 유형을 통해 한국미술의 특질을 비애미로 보았던 야나기 무네오시는 곧 이어 서구 중심의 엘리트 예술과 인위적인 근대성을 극복하는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이름 없는 잡기와 같은 민속공예품에서 꾸미지 않은 무작위와 무심의 아름다움을 또 다른 미로 발견하고 한국 미술의 특질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의 미술
1940년대 전반기 미술
대동아공영과 동양적 모더니즘의 진흥
-1940년 전후하여 대동아공영을 향한 신체제 문화운동과 결부하여 향토성 또는 토속성 전통성 들의 조선 정조가 서구 대항의 집단성과 단결력을 육성하는 파시즘 정서로 선양되면서 정책적으로 강조되었고 조선미전을 중심으로 진흥되었다. 이'신체제' 문화운동기는 '조선 문화 르네상스기'이며 '창조기'에 양적 절정을 이루었는데 향토적인 것과 조선적인 것 그리고 반도고전미술을 부흥하여 현대세계의 수준을 능가할 동양적 모더니즘 작품도 이러한 대동아공영의 신체제 문화운동에 수반되어 아카데미즘화되고 조선미술 창정의 당면과제로 진흥되었다.
1940년대 후반기 미술
-1945년 8월 15일 연합진영의 승리로 한국은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좌 우 대립과 미술단체이 분열
-새로운 민족 문화와 미술창건이 해방기 미술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운동은 단체와 조직의 결성을 통해 나타났는데 작품 창작보다 우선시되고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미술운동이 어떤 국가를 만드는가에 대한 사상적 이해관계와 밀착되어 전개 되어 대립과 분열을 촉발시켰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분야별 건설본부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이 되고 고희동이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문협을 주도한 임화가 인민성의 표어를 쓰게 되면서 좌경 논란으로 이어지고 좌파 정당과 단체들의 동합 움직임에 자극으로 미건이 해산되고 조선미술가협회가 다시 창립된다. (다시 정리)
민족미술 건설과 민족미술론의 성행
새로운 민족미술의 재건과 창조를 시급한 최우선ㅋ의 당면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시기보다 민족미술론이 강조되고 유행적인 간판이 되었으며 이에 대한 논의가 중추를 이루었다.
먼저 해방직후의 최초의 예술협회에서 내세운 강령은 일제잔재의 청상 국수주의와 퇴폐예술사조의 배격 민족미술의 신건설 국제미술과의 제휴 미술의 인민적 계몽과 후진의 적극적 육성 등은 좌파 문화예술계의 지도적 이론분자였던 임화와 김남천 등의 진조적 민주주의민족문화론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통일전선 운동을 좌파의 조직 강화로 인식한 우파는 미건을 해산하고 선언하였다. 미협을 창설하면서 정치에의 절대 불간섭과 엄정 중립으로 순수예술을 수호하고 미술가만으로 단합하여 미술문화의 독립적 향상과 민족미술의 창조로 건국에 이바지할 것을
자주적인 민족국가와 민족문화건설의 주도세력 범주에서 좌 ,우익간의 대립을 보이면서 민족미술론에서도 차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새로운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는 식민지와 봉건적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공감하였으나 청산의 대상과 방향 및 방법에서는 정치적 이념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달랐다. 좌파는 지주나 자본가 등을 배제한 인민을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하여 민족을 사회주의 이념의 공동체로 보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계급주의적 입장에서 중도파는 민족적 특수성과 함께 세계보편성을 구현하는 일반 민중인 평민 중심의 민족주의 이론에서 우파는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자유주의와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주의 관점에서 청산론을 개진하였는데 이런 대립적 노선이 미술계의 청산론과 건설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해방공간의 창작
-과거 청산과 새로운 민족미술 수립의 각오가 대단했으나 헤게모니와 결부된 선언적 의미와 운동적 성향이 강했고 창작에서도 진보적 리얼리즘을 제외하고는 1930년대의 경향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해방기의 창작은 조각 공예 건축은 눈 닦고 볼래야 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회화가 대종을 이루며 서양화와 동양화의 구별을 없애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상범은 1930년대 말부터 추구하던 산악이나 산촌 경관을 각진 묵면 또는 반점 모양의 준찰과 짧은 필획의 효과를 통해 나타낸 수법을 한층 심화시키며 청전양식의 수립을 향해 박차를 가했으며 변관식은 절제된 적묵과 파선의 강인한 묘사와 탐승객의 특유한 양태 등을 통해 '소정양식'의 예고했다. 김은호는 채색풍이 일제 잔재로 청산의 대상이 되자 북종화의 세필농채적 전통과 결부시키고 마지막 어진화사의 영예를 되살려 재기를 노렸다.
-서양화는 1930년대를 통해 크게 팽창되었던 화단의 조를 계승하면서 동양화에 비해 좌우 대립의 창작 경향이 노골적으로 전개 되었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4.03.01
  • 저작시기2012.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0660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