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사] 담배에 대한 이해 - 담배의 어원과 원산지 및 전파과정, 조선의 담배 문화와 일제 시대의 담배 및 식민지부터 1970년대의 담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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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상생활사] 담배에 대한 이해 - 담배의 어원과 원산지 및 전파과정, 조선의 담배 문화와 일제 시대의 담배 및 식민지부터 1970년대의 담배 광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담배의 어원

2. 담배의 원산지

3. 담배의 전파과정

4. 조선의 담배 문화
(1) 담뱃대의 구조
(2) 신분의 차이에 따른 담배문화
(3)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란?

5. 일제 시대의 담배
(1) 궐련의 등장
(2) 전매제도

6. 식민지~1970년대 담배 광고

본문내용

된 담배의 이름은 남령초나 담바고라고 불렀다. 남령초는 남쪽 국가에서 들어온 신령스런 풀이라는 뜻이다. "가래가 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을 때, 소화가 되지 않아 눕기가 불편할 때, 한겨울에 찬 기운을 막는데 담배를 피우면 좋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온 대목이다. 담배를 약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담배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신분이나 나이를 가리지 않고 피울 수 있었다. 지금처럼 윗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격식과 예절도 물론 없었다. 심지어는 4,5 세 아이들조차 담배를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을 정도로 담배 피우는 인구가 늘어났다고 한다. 그만큼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았고 유행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당시에는 호랑이도 담배를 핀다고 얘기해도 좋을 만큼 담배가 널리 퍼졌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담배를 피우는 데도 위 아래를 정하기 시작했다.18세기 말 유득공이 쓴<경도잡지>에는 '천한 자는 높은 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고... 지체 높은 관리가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면 잡아다 벌을 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 서민들은 담배를 피우다가 양반의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담뱃대를 감추었다고 한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특권을 양반반 향유할 수 있도록 제한한 것이다. 담배 예절이 정해지자 양반들은 담배에 관련된 모든 것에 한껏 치장을 하고 멋을 부리기도 했다. 담뱃대의 길이가 자신의 권위라고 여겨 긴 장죽이 등장했고, 담뱃대에 각종 장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담배는 하층민들은 함부로 피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담배가 도입된 17세기 누구나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시절이 한없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아무런 제한 없이 담배 피던 17세기에 대한 그리움을 당시의 민중들은 '호랑이도 담배피던 옛날'로 표현하면서 그리워했던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피던 옛날'은 담배가 도입된 17세기 무렵이다. 그러나 18세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담배를 약초 정도로 귀하게 여기던 양반들은 자신들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다. '호랑이가 담배피던 옛날'이란 말 속에는 이렇게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생활하던 민중들의 향수와 그리움이 짙게 담겨 있는 것이다.
5. 일제시대의 담배
(1) 궐련의 등장
얇은 종이로 가늘고 길게 말아 놓은 담배. ≒권연초·궐련초.
궐련은 일명 “가난한 사람들의 시가”라고 불렸다.시가는 아주 좋은 품질의 담배 잎을 선별하여 독특한 방법으로 약간 건조시킨 다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오랫동안 발효 시켜 적당한 크기의 원통형으로 말아서 만든 것이다. 맛과 향과 색깔이 탁월하였으며 탄력성이 크며 비단처럼 부드러워야 상품이다. 세계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는 것은 쿠바의 아바나시가 라고 할 수 있다.
옛날 멕시코 종족의 하나인 아즈텍 문명시대 사람들은 갈대나 사탕수수깡 속에 담배를 부셔 넣고 불붙여 흡연하였는데 이를 스페인 정복자들이 흉내내어 유럽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오늘날 지구상의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각양각색으로 즐기게되었다. 이와 같이 궐련은 작게 썬 담배를 종이에 말아 싼 것으로 시가보다 아주 연하다. 세계 제1차 대전 때 군인들의 정신위안 목적 등으로 병사들에게 담배를 무료로 공급하면서부터 인기가 높아져 오늘날 과 같은 종이에 말아 싼 담배를 여러 나라에서 다투어 적극 개발하게 되었고, 크게 유행 되었다.
(2) 담배의 전매제도
일본은 1894년 동학군을 진압한다고 인천에 1만명의 군대를 상륙시킨 이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의 라이벌들을 따돌렸다. 이후 1904년 8월에 마침내 제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이른바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첫 사업으로 재정고문부를 설치하고 앞으로 조선을 강점하여 통치하는 데 필요한 재정 수입의 확보를 위하여 세원조사에 착수하였는데 담배가 그 첫 번째 조사 대상이었다. 조선전매사 에 의하면 1905년부터 수년 동안 부원들을 전국각지로 파견하여 담배의 재배, 제조 및 판매에 관한 현황조사를 실시하였다. 전국을 20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서 기술원을 배치하여 표본 조사지의 경작 농가수, 모샹수와 면적, 파종량, 파종시기, 담배밭 수와 면적, 포기와 고랑간 거리, 단보당 수확량, 결손 포기수, 포기당 이파리수, 이파리당 무게등 감타이 나올 정도로 세밀하게 조사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조사원들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담배 재배농민들의 반발이 심했던 모양이다. 조선전매사 에 “경성에서 일어난 정변의 여파가 이듬해까지 각지로 번져서 폭도들이 횡행함으로써 용인출장소는 수원으로 옮기는 한편 온양출장소는 폐쇄하였으며 제천출장소는 폭도들에 의하여 건물이 불탔고 성천출장소는 습격을 받아 건물과 서류가 전소되고 직원이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담배의 재배, 제조 및 판매 현황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일합병 전해 인 1909년 2월에 법률 제4호로 연초세법을 제정하여 담배의 경작과 판매는 정부의 허가를 받게하고 세금을 부과하였다.
연초세법을 제정한 다음 해인 1910년에 결국 한일합방이 되고 늘어나는 재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하여 일제는 다시 담배에 기대를 걸고 머리를 짜냈다. 그래서 1909년에 공포한 연초세법은 구한 국정부에서 만든 것으로 미비한 점이 있다면서 1913년 7월에 연초세령을 새로 만들었다. 이전까지 과세 대상이던 담배의 경작세와 판매세 이외에 제조세와 소비세를 신설함으로써 담배의 조세 수입을 크게 늘렸는데 제조세는 영세한 조선인 제조업자를 고사시키고 재고 담배에 소비세를 부과하여 국내에서 일본 담배회사와 경쟁하던 미국과 영국의 담배회사를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다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정세 변화에 따라 식민지 경영을 위한 세출이 팽창하여 재정상의 수요가 늘어나자 믿을 수 있는 것은 담배뿐인지라 1920년에 담배세령을 또 다시 개정하였다. 제조세를 폐지하는 대신 소비세율을 25에서 35퍼센트로 올린 것이다.
6.식민지~1970년대 담배 광고
‘부귀,천귀’ (『매일신보』1911.06.11.) ‘ 솔개표, 육군표, 말표’(『매일신보』191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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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5.21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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