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국제정치론] 태평양 전쟁과 일본 (태평양 전쟁의 정의,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태평양 전쟁의 원인과 의의에 대하여 - 미국과 일본의 입장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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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국제정치론] 태평양 전쟁과 일본 (태평양 전쟁의 정의,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태평양 전쟁의 원인과 의의에 대하여 - 미국과 일본의 입장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1. 태평양 전쟁의 정의
 2.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Ⅱ. 본 론
 1. 태평양 전쟁의 원인분석-미국의 입장에서
  (1) 체제차원 분석
  (2) 국가차원 분석
  (3) 개인차원 분석
  (4) 소결론

 2. 태평양 전쟁의 원인분석-일본의 입장에서
  (1) 국가차원 분석
  (2) 개인차원 분석
  (3) 소결론

Ⅲ. 결 론
 -어떤 차원의 분석틀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력을 가지는가?

본문내용

. 당시 경제적 자급자족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석유를 미국에 의존해온 일본에게 이 금수조치는 치명타가 되었다. 삼국 동맹 체결 뒤 굳어져갔던 미국의 대일태도는 더욱 강경해져 양국 관계는 최악 상태에 빠 져 들어갔다. 이 때문에 일본 안에서는 대미 개전론이 고조돼 갔으며, 그에 따라 군부 발 언권도 나날이 높아갔다. 위의 책, pp. 30~32.
4) 도조내각 성립으로 개전의 길 선택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무력행사 외에 외교 교섭을 주로 하 고 전쟁 준비를 차선으로 하도록 하여 되도록 개전을 피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개전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미일 외교 교섭을 계속 주장하면서 개전 결단을 못 내리던 고노에 수상이 육군 주전파의 압박에 못 이겨 마침내 사직하게 되고, 후임 수상에는 자타가 공인한 주전론자인 도조 히 데키가 임명되었다. 히로히토가 도조를 수상에 임명한 것은 전쟁의 길을 택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뒷날 극동 군사재판에서 전범 제1호인 도조가 “일본의 신하가 폐하의 의사를 거역하면 서까지 국책을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라고 한 증언대로 천황의 승낙 없이 내각 이나 군부의 의사만으로는 개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전의 권한을 가진 최고 권력자인 히로히토 천황이 다양한 정보를 검토하고, 또한 개전파의 주장을 판단하여 개전 을 결심함으로써 일본 전사에서 최대 사건인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앞의 책, pp. 33~35.
(3) 소결론
살펴본 바와 같이 태평양전쟁의 원인에는 최고 결정권자인 히로히토 천황과 충실한 임무 수행자인 도조 히데키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수권의 독립과 같은 국가 내부의 시스템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론과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국가 체제 하에서 집행부의 의사결정을 효과적으로 막을 만한 장치가 없었다.
또한 천황을 신격화하여 천황의 국민, 천황의 군대로써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하나로 움직이게 만든 군국주의 체제야말로 태평양전쟁의 최대 원인 제공자라 할 수 있겠다.
Ⅲ. 결 론
- 어떤 차원의 분석틀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력을 가지는가?
우리는 태평양전쟁 발발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세 가지(개인분석, 국가분석, 체제분석) 분석틀을 모두 이용해 보았다. 그중 개인분석과 체제분석은 부분적 설명은 가능하지만 전쟁 발발의 전체적 원인을 규명하는데 있어서는 한계를 가진다.
먼저 개인분석이 설명력을 가지기 위해선 만약 히로히토 또는 도조 히데키가 없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 되어야 한다. 히로히토는 앞서 보았듯이 태평양전쟁 전후 일본의 최고 결정권자였다. 그러나 사실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히로히토는 군부의 전쟁계획을 수동적으로 승인해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고 전쟁에 직접적 개입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히로히토 개인이 전쟁에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조 히데키 또한 한 개인으로서는 전쟁에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내각에서 굳이 도조 히데키가 아니더라도 전쟁을 수행할 인물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도조 또한 전쟁을 지지한 군부 세력 중의 하나였을 뿐이지 그들 모두의 생각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권한을 가졌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체제분석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당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한 국제체제가 일본의 전쟁 도발을 억제할 정도로 힘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강대국이 없었던 태평양전쟁 당시에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제할 제도적 장치 혹은 군사적 힘이 있었다면 태평양전쟁을 방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국제연맹은 이름만 있고 실질적 권한은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국제연맹이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국제연맹 창설을 주창했던 미국이 이후 자국의 고립주의 정책에 의해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않은 데에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을 대신할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국제연맹은 창설 의미에 맞는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체제분석은 그 체제를 구성하는 각 국가의 제도나 이념에 좌우 된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만약을 가정하고 국가분석을 살펴보자. 일본이 전체주의(군국주의) 국가가 아니고 미국이 태평양 전쟁 전 고립주의 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전쟁이 있었더라도 태평양전쟁과 같이 대규모의 전쟁은 아니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 전 일본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많은 세력들이 있었다. 군부의 일부 세력들, 많은 지식인들과 국민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히로히토 천황까지,, 그러나 그러한 의견들은 여론과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국가 체제 하에서 정부에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만일 당시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미국이 루스벨트는 개입을 원했지만 대다수의 국민(95%)이 고립주의를 원했기 때문에 전쟁 전에 미리 개입을 못한 것처럼, 그러한 의견들이 정책에 반영되어 전쟁발발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미국 역시 고립주의 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일본의 전쟁 도발 전에 강력하게 대응함으로써 일본의 무모한 전쟁 도발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평양전쟁을 설명하는데 있어 어느 하나의 분석틀만 가지고는 완벽하지 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연구를 통해 두 가지의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 가 지는 전체주의, 혹은 군국주의와 같은 비민주적인 정치제도 하에서만이 몇 몇 개인들에 의한 국가정책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국제체제가 성립이 되기 위해선 그 체제를 구성하는 개개 국가들의 지배 이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국제체제는 국가 단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태평양전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개인분석과 체제분석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차원분석이 가장 설명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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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09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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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22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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