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식민지시대상황
2. 1910~1920년대의 노동운동
1) 노동자의 상황
2) 노동운동 & 노동조합
(1) 원산총파업
(2) 조선노동총동맹
3) 노동운동의 결과 & 정리
3. 1930~해방 직후까지의 노동운동(혁명적 노동운동)
1) 노동자의 상황
2) 노동운동 & 노동조합의 활동
(1) 공원회의 노동운동
(2) 파업투쟁
(3) 노동조합의 활동
3) 노동운동의 결과 & 정리
4. 식민지 시대의 노동운동이 미친 영향과 앞으로의 과제
참고문헌
2. 1910~1920년대의 노동운동
1) 노동자의 상황
2) 노동운동 & 노동조합
(1) 원산총파업
(2) 조선노동총동맹
3) 노동운동의 결과 & 정리
3. 1930~해방 직후까지의 노동운동(혁명적 노동운동)
1) 노동자의 상황
2) 노동운동 & 노동조합의 활동
(1) 공원회의 노동운동
(2) 파업투쟁
(3) 노동조합의 활동
3) 노동운동의 결과 & 정리
4. 식민지 시대의 노동운동이 미친 영향과 앞으로의 과제
참고문헌
본문내용
2
152
14,824
98
1933
176
13,835
79
1934
199
13,098
65
1935
170
12,187
72
1936
138
8,248
60
1937
99
9,146
92
1938
90
6,929
77
(3) 노동조합의 활동
이 시기에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들은 의식과 교양, 지식의 전파 등을 위하여 또는 문화로부터 배제된 식민지하의 하층 노동대중들에게 유용한 놀이와 여가 및 오락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민족적 계몽이나 근대적 교양에서 출발하였던 이들 활동들은 중반에 들어와 현실비판적인 여러 활동들을 통하여 강한 이념성과 정치성 및 진보성을 갖는 독자적인 문화형식을 만들어내었으며 1920년대 후반에 상당부분 조합내부로 국한되었지만 여전히 강한 이념성과 운동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동문화’의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는 이 활동들은 노동운동까지의 연구전통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1) 기관지, 화보, 신문의 발간
- 『연우』, 『인새공』, 『출판노조월보』등
2) 강연, 강좌, 연설, 토론회 등의 개최
- 계몽과 지식의 전파를 통한 교양과 계급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행해졌다.
3) 정기대회, 위안회, 음악회, 원족회 등의 개최
- 사회운동자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축사를 하거나 축문을 보내 공동의 연대와 우의를 표시하였다. 또한 정기대회나 조합의 창립기념식은 흔히 조합원 위안회나 음악회 등을 겸하여 노래와 춤, 극 등의 다채로운 내용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4) 5.1절의 기념
- 노동조합에서 5.1(메이데이)절을 기념하였던 것도 노동문화의 한 영역이었다.)
3) 노동운동의 결과 & 정리
혁명적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은 정세에 따라 또는 조직이 일정한 기반을 갖추면 투쟁으로 나섰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을 일제에 드러내야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혁명적 노동조합은 일제와 대결하면서 전위조직을 방불케 하는 조직투쟁술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조직 활동의 경험은 해방 이후 남한에서 지하활동을 하는데 크게 활용되었다.
"집회시 시간 장소를 엄수할 것, 참가 인원을 되도록 적게할 것, 무단결석자가 1인이라도 있을 경우 즉시 해산할 것, 문 입구에 표시해서 안전을 알릴 것. 전위로 보이는 자 및 타 조직에 속하는 잘 아는 친구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선배라도 조직의 존재를 절대 말하지 말 것."
이러한 조직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졌다. 이재유가 동지 박진홍의 집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이다. 이재유는 박진홍에게 자신이 매일 오후 4시에 돌아오겠지만 1분이라도 늦으면 검거되었다고 생각하고 즉각 증거가 될 문서를 파괴하고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라고 강조했다. 또 박진홍이 외출하면 이재유는 집밖에 나가 있다가 박진홍이 혼자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야 비로소 집안으로 들어갔다. 또 조직이 발각된 후 박진홍은 임신 중이면서도 이재유를 도망시키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견디다 그 휴유증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비참한 기형아'를 낳았다. 이 아기는 결국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리 보위를 철저히 하더라도 투쟁은 적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위험한 행위였다.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조직보위에 유의하면서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켰고, 3 1절, 메이데이 등 각종 기념일에는 삐라 살포와 같은 가두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부분 이 단계에서 일제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조직의 와해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종결으로 단정하기 곤란하다. 하나의 조직이 붕괴되면 뒤이은 후계 조직이 바로 결성되는 등 일제의 집요한 추적에도 새로운 조직의 결성과 재건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흥남의 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은 1차에서 20여명(1931년), 2차 500여명(1932년), 3차에서 60여명(1932년), 4차에서 9명(1932년)이 검거 투옥될 만큼 치열하게 활동했다. 이재유그룹은 와해될 때마다 조직이 재건되었고, 이재유가 구속된 후에도 후계활동이 이어졌다, 이러한 재건 투쟁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 혁명가들의 치열한 투쟁 의식과 함께, 검거를 대비해 치밀한 후속 재건계획을 마련한다든지 또는 대중적 기반을 광범위하게 가지고 있어 지도부가 체포되어도 남은 활동가들이 그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라기 보다 투쟁의 연속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4. 식민지 시대의 노동운동이 미친 영향과 앞으로의 과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혹독하였던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자라난 노동운동의 주류는 다른 어느 시기의 노동운동보다도 현실비판적이었고 또 정치지향적이었다. 1920년대 초반을 제외한다면 사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단일한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비록 제하된 범위였지만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일정 기간 지속되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하의 노동운동은 이 시기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전개된 것으로 양자는 비교적 동질적이었다. 운동의 이념과 목표, 전력과 전술, 그리고 운동자들의 인적인 구성 등이 일정한 형태로 계승되었다.
이후 분단정권이 수립되면서 노동운동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결별하였으며, 급격한 단절을 경험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일제하 노동운동에 잠재해 있었던 개량적, 어용적, 조류가 또다른 정치적 조건하에서 현실화한 것이었다. 이 조류는 1960, 70년대를 거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는 유력한 거점이 되었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의 급격한 분출과 폭발적 고양으로 권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구축한 의사대중적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의 주류는 민중지향의 진보성을 표방했는데, 이는 일제하 노동운동의 전통을 일정한 형태로 계승한 것이었다. 지난 시기 노동운동 역사와 경험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길사, 『한국사15-민족해방운동의 전개』, 한길사, 1994, 231~232쪽.
참고문헌
김경일, 한국 근대 노동사와 노동운동, 문학과 지성사
한길사, 한국사15-민족해방운동의 전개, 한길사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152
14,824
9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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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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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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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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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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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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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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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동조합의 활동
이 시기에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들은 의식과 교양, 지식의 전파 등을 위하여 또는 문화로부터 배제된 식민지하의 하층 노동대중들에게 유용한 놀이와 여가 및 오락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민족적 계몽이나 근대적 교양에서 출발하였던 이들 활동들은 중반에 들어와 현실비판적인 여러 활동들을 통하여 강한 이념성과 정치성 및 진보성을 갖는 독자적인 문화형식을 만들어내었으며 1920년대 후반에 상당부분 조합내부로 국한되었지만 여전히 강한 이념성과 운동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동문화’의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는 이 활동들은 노동운동까지의 연구전통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1) 기관지, 화보, 신문의 발간
- 『연우』, 『인새공』, 『출판노조월보』등
2) 강연, 강좌, 연설, 토론회 등의 개최
- 계몽과 지식의 전파를 통한 교양과 계급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행해졌다.
3) 정기대회, 위안회, 음악회, 원족회 등의 개최
- 사회운동자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축사를 하거나 축문을 보내 공동의 연대와 우의를 표시하였다. 또한 정기대회나 조합의 창립기념식은 흔히 조합원 위안회나 음악회 등을 겸하여 노래와 춤, 극 등의 다채로운 내용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4) 5.1절의 기념
- 노동조합에서 5.1(메이데이)절을 기념하였던 것도 노동문화의 한 영역이었다.)
3) 노동운동의 결과 & 정리
혁명적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은 정세에 따라 또는 조직이 일정한 기반을 갖추면 투쟁으로 나섰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을 일제에 드러내야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혁명적 노동조합은 일제와 대결하면서 전위조직을 방불케 하는 조직투쟁술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조직 활동의 경험은 해방 이후 남한에서 지하활동을 하는데 크게 활용되었다.
"집회시 시간 장소를 엄수할 것, 참가 인원을 되도록 적게할 것, 무단결석자가 1인이라도 있을 경우 즉시 해산할 것, 문 입구에 표시해서 안전을 알릴 것. 전위로 보이는 자 및 타 조직에 속하는 잘 아는 친구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선배라도 조직의 존재를 절대 말하지 말 것."
이러한 조직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졌다. 이재유가 동지 박진홍의 집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이다. 이재유는 박진홍에게 자신이 매일 오후 4시에 돌아오겠지만 1분이라도 늦으면 검거되었다고 생각하고 즉각 증거가 될 문서를 파괴하고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라고 강조했다. 또 박진홍이 외출하면 이재유는 집밖에 나가 있다가 박진홍이 혼자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야 비로소 집안으로 들어갔다. 또 조직이 발각된 후 박진홍은 임신 중이면서도 이재유를 도망시키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견디다 그 휴유증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비참한 기형아'를 낳았다. 이 아기는 결국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리 보위를 철저히 하더라도 투쟁은 적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위험한 행위였다.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조직보위에 유의하면서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켰고, 3 1절, 메이데이 등 각종 기념일에는 삐라 살포와 같은 가두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부분 이 단계에서 일제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조직의 와해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종결으로 단정하기 곤란하다. 하나의 조직이 붕괴되면 뒤이은 후계 조직이 바로 결성되는 등 일제의 집요한 추적에도 새로운 조직의 결성과 재건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흥남의 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은 1차에서 20여명(1931년), 2차 500여명(1932년), 3차에서 60여명(1932년), 4차에서 9명(1932년)이 검거 투옥될 만큼 치열하게 활동했다. 이재유그룹은 와해될 때마다 조직이 재건되었고, 이재유가 구속된 후에도 후계활동이 이어졌다, 이러한 재건 투쟁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 혁명가들의 치열한 투쟁 의식과 함께, 검거를 대비해 치밀한 후속 재건계획을 마련한다든지 또는 대중적 기반을 광범위하게 가지고 있어 지도부가 체포되어도 남은 활동가들이 그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라기 보다 투쟁의 연속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4. 식민지 시대의 노동운동이 미친 영향과 앞으로의 과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혹독하였던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자라난 노동운동의 주류는 다른 어느 시기의 노동운동보다도 현실비판적이었고 또 정치지향적이었다. 1920년대 초반을 제외한다면 사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단일한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비록 제하된 범위였지만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일정 기간 지속되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하의 노동운동은 이 시기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전개된 것으로 양자는 비교적 동질적이었다. 운동의 이념과 목표, 전력과 전술, 그리고 운동자들의 인적인 구성 등이 일정한 형태로 계승되었다.
이후 분단정권이 수립되면서 노동운동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결별하였으며, 급격한 단절을 경험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일제하 노동운동에 잠재해 있었던 개량적, 어용적, 조류가 또다른 정치적 조건하에서 현실화한 것이었다. 이 조류는 1960, 70년대를 거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는 유력한 거점이 되었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의 급격한 분출과 폭발적 고양으로 권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구축한 의사대중적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의 주류는 민중지향의 진보성을 표방했는데, 이는 일제하 노동운동의 전통을 일정한 형태로 계승한 것이었다. 지난 시기 노동운동 역사와 경험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길사, 『한국사15-민족해방운동의 전개』, 한길사, 1994, 231~232쪽.
참고문헌
김경일, 한국 근대 노동사와 노동운동, 문학과 지성사
한길사, 한국사15-민족해방운동의 전개,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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