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농민운동의 개념과 역사적 배경 (농민운동의 발생 근거,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 계획,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식민지사업, 소작쟁의의 배경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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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농민운동의 개념과 역사적 배경 (농민운동의 발생 근거,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 계획,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식민지사업, 소작쟁의의 배경과 활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농민운동의 발생 근거
 1) 한국의 농민운동
 2) 식민지 정책에 의한 농업 구조의 변동

2.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 계획
 1) 토지조사사업
  (1) 일제가 실시한 토지사업의 목적
  (2) 토지조사사업의 실시 목적과 그 결과
 2) 산미증식 계획
  - 산미증산계획의 실시

3.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식민지사업
 -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

4. 소작쟁의의 배경과 그 활동
 1) 소작쟁의 발생의 조건
 2) 소작농운동 단체의 등장
 3) 소작쟁의의 배경과 그 활동
 4) 소작쟁의의 두 가지 대상과 성격
 5) 소작쟁의에 대한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결성으로 농민운동은 보다 정치적 성격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소작쟁의는 1947년 이후에는 부재지주(不在地主)의 방매로 인한 빈번한 소작권의 이동에서 일어났다.
이우재 「한국농민운동사」.한울. 1988. 38쪽
4) 소작쟁의의 두 가지 대상과 성격
일제하 소작쟁의는 그 대상에 따라 한국인 지주에 대한 투쟁과 일제 지주에 대한 투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한국인 지주와의 투쟁을 보면 1922년 12월 순천에서 경우처럼 1,600명의 면민이 지주와 대항하다가 면이나 군 또는 주재소에 진정을 하는데 이 과정이 일반적 형태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제 관헌의 개입으로 간부와 검거, 투옥 등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면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암태도 소작쟁의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소작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조선인 지주에 대한 투쟁은 투옥, 재판 등의 일제의 탄압을 낳게 되면서 농민운동을 정치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이것은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반제투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반제정치투쟁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농민운동이라는 성격을 넘어 노동운동, 문화운동, 청년운동, 독립운동 등의 단체들과 연합하는 성격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 소작쟁의는 반봉건 반제투쟁의 핵심을 이루게 되고, 1925년부터 치안유지법의 발동 등의 탄압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소작농운동의 농민운동의 그 방법을 달리하게 된다.
때문에 일제식민지하 농민운동은 바로 민족해방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가 소작쟁의 농민운동을 그렇게 철저히 탄압했던 것이며 반대로 소작 농민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지위향상의 요구에서 머물지 않고 운동의 상대적 발전 논리에서 농민 조합 형태의 전농민적 정치 투쟁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시 이것은 바로 민족해방투쟁의 길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하 농민운동은 후기에 농민조합운동으로 넘어가가 된다.
5) 소작쟁의에 대한 결론
기존의 식민지 시대에 관한 연구에서 식민 국가를 상호 작용하는 조직이나 행위자로 파악하는 대신에 억압력이나 수탈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식민 국가는 자신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적소를 찾아 통치를 수행한다. 이러한 식민 국가는 자신이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해 최소의 비용을 사용하려고 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에 있어서도 이러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총독부는 농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 본국으로의 수출을 확대할 수 있는 농업생산량의 증대와 식민지 국민에 대한 원활한 통치라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지주를 통한 농민의 지배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총독부의 의도는 농민들이 1920년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소작쟁의로 인해 수행 불가능하게 되며, 이러한 조건에 따라서 총독부는 농민들에 대한 새로운 지배 전략을 고려하게 된다.
소작쟁의와 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소작농의 권력증대에 대응하기 위해 식민지 국가는 스스로 정책의 방향을 선회하여 표면적으로 지주를 견제하고 소작농의 권인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화시키게 된다. 1930년대의 농업 정책의 변화를 통해 국가의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소농민의 영농의 발전을 국가가 활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고, 계급쟁의로 인해 발생하는 생산력의 정체, 혹은 농민들의 저항을 무마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소작쟁의 투쟁의 주체인 소작인들로 하여금 ‘자작농창정계획’ 을 비롯한 ‘농촌진흥운동’을 통해서 안정적으로 생산력을 증진하도록 유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농민계층의 영농기술의 발전과 소작쟁의를 통해 나타난 국가에 대한 위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는 자신의 정책을 자작농을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이 국가의 외적 상황이 국가의 정책을 이런 식으로 구성하게 한 것이 아니라, 소작농의 성장이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부여한 것이다. ‘소작개선에 관한 건’, ‘조선 농지령’, ‘자작농 창정계획’, ‘농촌진흥운동’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과정이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농민조직의 성장과 영농 발전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던 역량의 증가는 1930년대의 일제하의 농촌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총독부는 단순히 어떤 세력과 일정한 유대를 유지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세력과 관계맺음을 통해 식민지 지배에 가장 효과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지주를 육성하는 정책은 이미 지주층이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계속수행될 수가 없었다. 또한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억압력을 강화하는 정책은 단기적인 효과를 획득할 수는 있으나, 농민을 황국식민화로 포섭하여 지배하려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경찰력의 동원은 그다지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 당시의 재정구조가 취약했다는 점과 본국의 지원이 없었던 요인 역시 국가의 정책 수행에 있어서 강제력의 방식으 채택하지 않은 원인이 된다.
식민지이기 때문에 민족쟁의와 수탈이 나타났다고 즉자적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식민지에서 국가의 구조적 왜곡으로 인해 나타난 계급적 대립의 요소와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조직력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탐구하는 것이 이 당시 시대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식민지시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수탈과 근대라는 논의를 넘어서면서 총독부 정책의 성격과 변화를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소작쟁의라는 집합행위를 통해 자신의 세력이 규합하고,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경험은 농민들이 사회적 행위자로 대두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것이다. 농민들의 경험은 이후 해방 공간에서 농민들의 격력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이우재 「한국농민운동사」.한울. 1988
곽건홍, 「농민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순국』, 1996
김남순『한국사 14』,한길사, 2004
조영건, 「1920년대의 한국농민운동」, 『건대사학』,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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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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