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세가 (孔子世家)> 공자, 공자생애, 공자에 관한 모든 것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공자세가 (孔子世家)> 공자, 공자생애, 공자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과 자리를 함께 하다)
노나라 애공이 관에서 묵을 때 공자가 손님의 계단(賓階)을 통해 오르자 공이 자리에 앉으라고 명하고 정치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고 또 오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노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작게 거두면 백성은 넉넉해집니다. 예교를 존중하고 범죄를 멀리 하면 백성들은 장수할 것입니다.
12.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은 각각 노역자들을 보내어 들판에서 공자를 포위했다. 그래서 공자는 초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어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학술강의도 하고 책도 낭송하고 거문고도 타면서 지냈다. 자로가 화가 나서 공자에게 말했다.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곤궁해도 절조를 지키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탈선한다”자공이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했다. 공자가 말했다.“사야, 너는 내가 박학다식하다고 생각하느냐?”자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까?”공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한 가지 기본원칙을 가지고 전체의 지식을 통찰한 것뿐이다”
於是乃相與發徒役圍孔子於野. 不得行, 絶糧. 從者病, 莫能興. 孔子講誦弦歌不衰. 子路見曰ː“君子亦有窮乎?” 孔子曰ː“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子貢色作. 孔子曰ː“賜, 爾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曰ː“然. 非與?” 孔子曰ː“非也. 予一以貫之.”
→ 一以貫之한다는 점을 주목할 것.
13.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 애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의 근본은 신하를 잘 뽑는데 있습니다.”계강자도 정치에 관해서 질문하자 공자가 말했다. “정직한 사람을 뽑아서 부정직한 사람 위에 놓으면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해집니다.”계강자가 도적이 횡행함을 근심하자 공자가 말했다. “진실로 당신 자신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준다해도 백성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으며 공자 또한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
孔子之去魯凡十四歲而反乎魯. 魯哀公問政, 對曰, “政在選臣.” 季康子問政, 曰, “擧直錯諸枉, 則枉者直.” 康子患盜, 孔子曰, “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直錯諸枉에 주목할 것
14. 공자의 시대에는 주 왕실이 쇠퇴해져 예악은 폐지되었고 시서가 흩어졌다. 이에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하여 서전의 편차를 정하되 위로는 요와 순 임금의 시대부터 아래로는 진목공에 이르기까지 그 사적을 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공자는 또 은과 하나라 이래의 예가 손익된 것을 보고 말했다. “차후로는 비록 백세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예제의 변천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은나라는 질박함을 귀히 여겼고 주나라는 문체를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주 왕조는 하와 은 2대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문화는 참으로 풍성하고 화려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孔子之時,周室微而禮樂廢,詩書缺.追迹三代之禮,序書傳,上紀唐虞之際,下至秦繆編次....觀殷夏所損益曰, 雖百世可知也,以一文一質,周監二代,郁郁乎文,吾從周.故書傳禮記自孔氏.
周監二代 吾從周에 주목할 것
15. 공자는 생선이 상했거나 고기가 부패했거나 아무렇게나 잡아서 멋대로 잘라놓은 고기는 먹지 않았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고 상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할 때는 배불리 먹은 일이 없었다. 곡한 날은 종일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사람이나 맹인을 보면 비록 그가 어린애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표정을 바꾸어 동정을 표시했다. “세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도리 사람이 있다”... 공자는 괴이한것, 폭력, 문란한 것 그리고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魚, 肉敗, 割不正, 不食. 席不正, 不坐. 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是日哭, 則不歌. 見齊衰·者, 雖童子必變. “三人行, 必得我師.”...子不語怪力亂神.
三人行,必得我師 / 怪力亂神에 주목할 것.
16. “옛날처럼 황하에서 다시는 용이 도판을 메고 나타나지 않고 낙수에서 다시는 거북이 서판을 지고 나타나지 않으니 나의 희망도 이제는 끝나는가보다!”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했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공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구나!”자공이 말했다. “어째서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십니까?”공자가 말했다“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래에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명에 이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뿐이 아니겠는가?”(曰,“河不出圖, 不出書, 吾已矣夫!” 顔淵死, 孔子曰,“天喪予!” 及西狩見麟, 曰,“吾道窮矣!” 然歎曰,“莫知我夫!” 子貢曰, “何爲莫知子?”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下學而上達에 주목할 것 / 河圖洛書
17.“천하에 도가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하나라 사람들은 장사를 치를 때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고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제 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다”그 후 7일이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73세로 그것은 노애공 16년 4월 기축일(을축일)의 일이다.
“天下無道久矣, 莫能宗予. 夏人殯於東階, 周人於西階, 殷人兩柱閒. 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 予始殷人也.” 後七日卒. 孔子年七十三, 以魯哀公十六年四月己丑卒.
문묘를 세우고 집을 짓다.
노애공 17년 봄 공자가 죽고 애공이 문묘를 세우고 문묘를 지키기 위한 사람이 일백호였다.
공자는 제후나 방백의 지위에 있지 않고도 세가로 칭한다. 공자가 포의를 입고 십여세를 지났어도 학자들의 종주가 되었다.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의 육예를 말하는 모든 사람의 종주가 되었으니 선생이야말로 성인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기에 세가가 되었다.
(孔子無侯伯之位而稱世家者.太史公,以孔子布衣,傳十餘世學者宗之. 自天子王侯,中國言六藝者宗之. 夫子可謂至聖,故爲世家)
  • 가격2,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4.06.30
  • 저작시기2014.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708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