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수당 전쟁 - 세계적인 문명간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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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와 수당 전쟁 - 세계적인 문명간의 충돌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리면서 피로와 염증도 컸겠지만, 중앙정계의 정파적 분열과 대립이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정권이 백성의 신뢰를 상실했던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막리지직을 둘러싼 오랜 정쟁이 예상되지만, 연개소문가의 집권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그리고 그 아들 사이의 알력으로 이어진 것은 대당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들의 무단독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호불신을 극도로 조장했을 것으로 본다.
둘째, 고구려는 새로운 전술전략을 개발하는 데 태만했던 것 같다. 대당전쟁 때도 대수전쟁 때와 전술전략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당은 고구려 보장왕 4년 대병력으로 침공한 이후 장기전략을 수립하여 2代의 제왕에 걸쳐 실천하면서 고구려 내정의 변동을 끈질기게 기다렸던 것이다. 특히 말기의 전쟁에서 당은 수륙 양군이 긴밀하게 상응하면서 지속적 장기전을 수행한 데 반하여 고구려에는 수군의 활동이 미미하거나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는 전통적 수성전으로 대응하면서도 대병력을 동원하여 당병과 회전한 예가 있다. 보장왕 4년의 고연수는 패배했지만 보장왕 21년의 연개소문은 방효태군을 전멸시켰다. 이 대병력 동원은 주목된다.
셋째, 고구려가 대당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찾는다면 대수정책을 올바르게 설정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하겠다. 고구려 정계는 강온 양파가 있었는데 대수 강경파에 의하여 요서지방의 선제공격이 이루어졌고 수는 대고구려전쟁으로 멸망하였다. 그 결과 당이 탄생되었지만 당의 대고구려관은 고정되기에 이르렀다. 수당은 모두 패권주의에 의한 대외정책을 폈고 따라서 수당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성을 절대시하였다. 여기에는 오직 복종 아니면 투쟁뿐인 듯도 했다. 그러나 수에 대한 선제공격만은 피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긴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형식적 조공과 책봉 속에서 고구려가 국제적 균형과 자국의 독자성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수당에 대한 고구려의 강경파란 결국 강압적인 수당에 대하여 독자적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당관계에 이르러 강경파로 알려진 연개소문까지도 당과의 전쟁만은 막아보려는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노력이 당의 일부 관료에게 인식되어 방현령의 반전론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결국 고구려의 대 수 당 전쟁과정에서 수에게 승리했던 그 자체 속에 이미 대당전쟁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면 당에게 패망할 인자도 잉태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구려가 당에 대비한 증거는 보이지만, 수의 침략을 격퇴한 이후 당 또한 같은 전술로 방어하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사실 새로운 전술전략이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장기적 전쟁과 무단독재가 민심을 이반시켜 대당전쟁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국사 편찬 위원회,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2002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8
박영규, <한권으로 보는 고구려 왕조실록> 웅진닷컴, 2001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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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8.29
  • 저작시기2014.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35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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