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역사 원시~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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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집의 역사 원시~고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원시 시대
(1) 구석기 시대
(2) 신석기 시대
(3) 청동기 시대

2. 고조선
(1) 고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온돌
(3) 온돌, 문화를 바꾸다.

3. 삼국시대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4. 고려 시대

본문내용

칠성과 남두육성 그리고 동쌈성과 서쌈성 등 총 26수의 별자리가 그것이다. 고구려는 자체 천문대를 갖추고 서역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천문체계를 일본에 전할 만큼 천문지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원작 KBS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1』, 효형출판, 2000, 68~82
(2) 백제
백제의 주거 또는 건축에 대한 자료는 매우 빈약한 실정인데, 다만 신당서 동이전 백제조의 속여고려동이란 기록으로 미루어 백제의 주택은 고구려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남조에서도 불교 및 각종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건축에서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되는데, 백제인들이 건축한 일본 호류지 5중탑과 부여 박물관 소장의 백제 공예탑 전돌, 기와 등의 문양을 통하여 상류쥬택이나 왕궁의 건축 또한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신라가 자기 나라의 대표적인 사찰인 황룡사와 불국사를 조영할 때 백제의 아비지와 아사달을 불렀다는 사실은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백영흠, 전통 건축의 이해.
(http://www.tgma.org/sub/info_guide.htm?no=22336&page=1&action=read&category=&keyword=&code)
(3) 신라
신라시는대는 골품제도에 의해 각 계급간에 적용되었던 가사규제가 이루어졌다.
즉 왕족인 성골은 별도의 규제가 없었으나 진골에서부터 일반 백성은 방의 규모와 지붕의 구조 및 장식, 단청의 사용 여부, 다듬은 돌에 의한 계단의 설치 여부, 그리고 담장의 높이와 장식의 규제에서부터 심지어 문의 구조와 실내 발의 장식 및 가구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규제사항을 열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신라의 상류주택은 상당한 수준의 구조와 장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생활의 정도나 문화수준이 높고 사치스러웠다고 생각되며, 특히 통일신라 이후에는 당나라와의 교역을 통하여 당시 중국의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이 도입되어 상류계층의 주택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금입택이나 사절유택과 같은 기록으로도 추측이 가능하며,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에서 보이는 건축술과 출토유구의 세부 건축기법을 통해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백영흠, 전통 건축의 이해.
(http://www.tgma.org/sub/info_guide.htm?no=22336&page=1&action=read&category=&keyword=&code)
구분
신분
진골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백성
실 폭과 너비
24척 이내
21척 이내
18척 이내
15척 이내
기와
막새기와 금지
막새기와 금지
막새기와 금지
막새기와 금지
기붕구조
부연금지
오량구조 및 공포 금지
우물반자 금지
지붕장식
현어금지
현어금지
수두금지
수두금지
건축재료
금, 은, 유석 금지
백랍금지
동랍금지
산느릅나무 금지
채색
단청금지
기단 및 계단
삼중계 금지
건계 및 이중계 금지
석재
다듬은 돌 금지
산석 금지
담장구조, 높이
양동, 석회칠 금지
높이 8척 이내
높이 7척 이내
높이 6척 이내
대문
-
중문, 사방문 금지
대문, 사방문 금지
발과 병풍장식
비단자수의 금지
침상재료
대모, 침향 금지
회양목 금지
말의 수
-
5필 이내
3필 이내
2필 이내
4. 고려 시대
고려는 918년에 개국하여 935년(태조 18)에 통일신라를 평화적으로 정복하였고, 다음해에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여 이루어진 국가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주택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주택을 계승한 것이었고, 이것이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천되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택건축이란 일단 건축되면 상당한 기간 그 건축에서 생활하며, 설사 왕조가 바뀐다고 곧 건축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려의 주택역시 목조가구식으로 귀족계급은 기와집이었고, 서민계급은 초가에서 생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주택도 현존하는 주택으로는 려말선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맹씨행단 밖에 없어 문헌자료 등을 통하여 추정할 뿐인데, 문헌으로는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이 있다. 이 책은 송나라 사신을 수행해 온 서긍이 짧은 시간에 본 고려의 기행문으로 중국인으로서의 우월감에서 과장되거나 초라하게 기술한 면도 없지는 않으나 비교적 고려중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민거조에는 ‘송악의 지세는 평평하지 못하고 산두둑이 많은데 왕성은 크고 화려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의 집은 마치 개미굴이나 벌집모양으로 보였으며 부잣집은 기와를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와탑조에는 침상 앞의 평상에는 삼면에 난간이 둘러져 있고 비단보료를 깔아 전혀 이풍을 느낄 수 없었으며 일반 사람들은 땅을 파 아궁이를 만들어 흙침상을 만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서민주택은 고구려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하였다는 온돌바닥을 한 초가가 그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상류주택은 송나라 귀족과 별 차이가 없는 중국풍의 입식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인로의 공주동정기에는 동이욱실(冬以室) 하이양청(夏以凉廳)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욱실이란 온돌방을 의미하고 양청이란 대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남부지방에서 발생한 마루구조가 통일된 고려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주택에서의 또 하나의 특징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자신의 탄생이 도선의 비기에 힘입은 바 있으며 십훈요 중 3훈요가 풍수도참사상에 관계되는 내용일 정도로 풍수에 심취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읍지의 선정에도 풍수지리에 기반을 두었으며 주택지의 선정에도 풍수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말에는 정몽주가 향교를 신설하고 주자가례에 따라 사서로 하여금 가묘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때 부터 우리나라의 전통주택에는 사당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주택의 구성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백영흠, 전통 건축의 이해.
(http://www.tgma.org/sub/info_guide.htm?no=22336&page=1&action=read&category=&keyword=&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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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4.10.14
  • 저작시기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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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4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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