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뒤 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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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항 뒤 집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화기 이후
2. 일제시대
3. 해방 이후
1) 해방촌
4. 1960년, 1970년대
1) 벌집
2) 달동네
3) 아파트
5. 1980년대

본문내용

동) 연구」,『서울학연구』, 2000
그림6) 남산해방촌
http://photo.naver.com/view/2007042816121423327
4. 1960, 1970년대
1) 달동네
달동네는 식민지 시대 토막에서부터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여 볼 수 있다. 달동네의 형성 을 보면 서울시는 도심부의 불량주택지대를 도심재개발계획이라 하여 무허가 건물을 철거 및 이전을 하였는데 철거된 무허가건물 입주자에게는 정착지라는 것이 제공되었다. 시 외 곽 변두리 대규모 국 · 공유지에 각각 8평의 땅을 나누어 주어서 새로운 무허가건물을 지 어 살도록 한 정책이었다. 즉 전혀 개발이 안 되는 땅에 대체적인 도로의 선만 긋고 가구 별 점유 토지의 위치를 지정해주면 그곳에 가마니나 판자집, 움막집을 짓고 거주하되 도로 · 하수도 등의 기반시설은 입주민 자치에 의해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천막촌과 판자촌으로부터 강제로 쫓겨난 그들은 또 다시 더 먼 도시의 주변부에 정착하여 빈민촌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1980년에 들어서자 건설업의 주 시장인 중동지방의 건설 경기가 원유가의 하락으로 퇴락하여 이들 건설회사의 활로가 막히자 도시미화라는 미병하 에 재개발 즉, 불량주택 개선사업을 통한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퇴거정책을 강행하여 독점
재벌회사의 도산을 막고 존립시켜 갔다. 이리하여 1970년대에 새로이 형성된 빈민층은 무 자비한 폭력적 퇴거를 당하여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박탈당하였다.8) 김종화, 「都市貧民에 관한 硏究」,『法政論叢』, 1988, p191
9)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insok/txt/text/2-4-2-3.html
그림7) 달동네
http://cafe.naver.com/scsu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64
2) 벌집
벌집이라고 하면 흔히 벌들이 사는 집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벌집은 그 주체가 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236개의 영세업체가 집중된 구로공단의 경우 기 숙사를 통한 근로자의 자체수용(自體收容)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근로자는 공 장 주변에 산재한‘벌집주택’에 초고밀상태(超高密狀態)로 생활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단 독주택이지만 평균 10∼30가구(최대 50가구)가 생활할 수 있도록 구조변경하므로써 비둘 기집과 같은 가장 단순한 세가(貰家)의 모습을 표출하고 있었다. 더욱이 통로는 협소하면 서 불규칙하고 미로의 성격을 안고 있어 보건위생, 소방, 보안, 일조권, 조망권에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근로자는 섬유, 전자업종이 많은 사실과 관련하여 촌락사회로 부터 전입되어 온 젊은 여성이 압도적인 것도 문제되고 있었다. 제3단지가 위치하고 있는 가리봉동을 기준으로 할 때 남자 41명에 대하여 여성이 100명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전입에 의한 여초현상(女超現象)은 미장원, 양품점, 여화점(女靴店) 등이 즐비한 여성 일색의 도시구조로 탈바꿈 하는 결과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장의 집적이익에 반비례하여 매연, 폐수, 소음 등 환경오염의 문제가 심각한 현실로 제기되고 있었다.
그림8) 벌집 (판자촌)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id=mbj389m&bno=21186&nid=11099
3) 아파트
* 아파트 난방의 변화
1962년에 지어진 마포 아파트는 연탄개별난방 방식을 하였다. 그리고 67년 한남동 외 인 아파트에서 최초로 중앙 난방방식이 채택하였고, 68년 힐탑 아파트에 중앙난방 방식 을 채용, 70년대 들어오면서 고층 아파트의 난방 방식으로 일반화 되었다. 이와 함께 연 탄아궁이나 보일러실이 실내에서 없어지고 부엌부분의 상대적인 면적확장을 가져왔으며, 생활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70년대 방열기 시스템 방식이 채택 되었고 80년 대 벽식 구조 방식이 채택 되었으며 현재는 바닥온돌난방방식이 일반화 되어 있다.
* 시민 아파트의 등장
시민아파트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1968년 6월 12일자 각 일간신문 4면 서울판 구석에 2단짜리 짤막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기사내용을 풀이해 보면「서울시가 서대문 밖 영천 지구 재개발사업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 일대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무허가건물을 철거 이주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이들 무허가건물을 봉천 · 신림 등지의 정 착지나 광주대단지(廣州大團地)로 보내기보다 차라리 재개발계획지구 내에 값싼 프레임 아파트를 세워 집단 이주시키면 기존의 생활근거지도 바꾸지 않게 되고 철거 이주에서 생기는 저항도 없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천연동 산허리에 4∼5층짜리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고 해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따지고 본다면, 당시 무허가건물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아파트에 살면서 세금을 낼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대단지로 옮겨 살게 되었다.
5. 1980년대
1980년대 주거형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연증가와 핵가족화에 따른 가구수의 급증과 도시화에 의한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 등으로 도시의 주택 부족 현상이 가중되어 초고층 아파트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의 주택정책이 주로 양적 공급에만 치중하였다면, 1980년대의 주택정책은 질적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건축자재의 고급화와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서민주택은 1970년대의 평면이 유지되면서 거실이 가운데 위치하는 형태가 계속되었다. 아파트의 경우는 중앙공급 난방방식이 증가하였고, 서민주택에서는 연탄보일러식이 주종이었으나 기름보일러로 점차 바뀌었다.
상류주택의 특성인 2층 구조와 2개의 욕실 평면형이 중류주택까지 파급되었다. 1985년에 다세대주택법안이 통과되면서 1970년대의 미니 2층식 구조의 지하임차공간이 없어지고 외부계단을 설치하거나 출입구를 분리하는 방법 등으로 2층으로 분리된 단독주택 형태의 임차 공간이 형성되었다.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8&dir_id=803&docid=160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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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0.14
  • 저작시기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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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4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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