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일제)이 조선에 시행한 아편정책 (아편전쟁,아편정책,마약,만주사변, 아편공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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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일제)이 조선에 시행한 아편정책 (아편전쟁,아편정책,마약,만주사변, 아편공급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본의 마약공급지 조선에 대한 구상
Ⅲ. 1차 대전 종전 후 조선 내 마약소비의 증가
Ⅳ. 만주사변 발발 이후 아편공급지로의 전환
Ⅴ. 결론
참고자료

본문내용

중독자의 증가가 관련 법규의 제재가 미약했던 것이 원인이었음을 인정했다. ‘조선전매사’와 ‘조선아편마약제도조사보고’에도 언급되었듯이 아편에 비해 여러 가지로 간편할 뿐만 아니라 관련 처벌법규 및 구체적이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핀이 만연되기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일본은 당시 마약의 폐해를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조선의 마약 관련 처벌법규를 아편과 비교하여 매우 가볍게 규정하였다. 이런점들은 결과적으로 정부에서 가벼운 제재를 가한 마약사용에 대해 남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1920년대 마약에 관한 조선에서의 관대한 처벌과 다이쇼 제약주식회사의 해외 판매부진 등은 조선 내 마약중독자의 수를 크게 증가시켰다. 당시 조선 내 모르핀 중독자 수에 관해서는 믿을 만한 공식적인 통계자료가 없다. ‘조선아편마약제도조사보고’에 의하면 1930년도의 중독자 수는 자혜의원과 도립의원 환자 9,498명 외에도 다수의 민간의원에서 진료 받은 중독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해의 중독자 수는 1만 명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조선에서의 마약중독 상황의 심각함을 알 수 있는 몇가지 근거가 더 있는데, 당시 김준연은 일본 당국에 대해 조선에서의 실질적인 마약단속 법규의 제정을 촉구하였다고 도쿄 아사히 신문에 게재되었다.
조선 내 마약중동작의 삼각성이 조선지배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조선에 대한 일본의 마약대책은 다이쇼 제약주식회사의 지정 취소와 함께 전환되었다. 즉, 1920년대 말까지 조선에서의 마약중독자 증가는 범죄율의 증가와 노동자의 생산성 저하를 초래하였고, 나아가서는 중독된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입국으로 일본의 범죄율 증가와 함께 일본에서의 마약 만연을 우려하게까지 되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모르핀 중독자를 근절하고 여러 가지 폐해를 일소하기 위해 모르핀류의 제조판매를 관영화 하였다. 이와 함께 중독자를 등록하여 치료를 시행하는 한편 모르핀류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1929년 9월에 재차 전매국 관제를 개정, 아편수납의 사무를 모르핀류의 제조 및 판매 사업의 신규개시와 동시에 전매국 소관으로 환원하게 되었다. 이로써 경성 전매지국 인의동 연초 제조공장 내에 모르핀제조공장을 설치하게 되었고, 이것이 완료된 1930년 3월 하순부터 사업의 개시에 들어갔다.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마약중독자에 대한 등록과 치료를 거쳐 1939년에 이르러 조선에서의 모르핀 중독자는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Ⅳ. 만주사변 발발 이후 아편공급지로의 전환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다음 해 이 지역에 만주국을 수립하고 대만, 관동주와 같이 점금주의에 근거한 아편전매제도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아편정책은 경제적인 측면이 많이 고려된 것이었으며 지역의 지배력 확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일본은 만주국에서도 역시 점금주의에 근거한 아편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만주국의 전매과정에서 필요한 아편은 원칙적으로 지역 내에서 조달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소비지라는 관점에서 일부 부족분에 대해서는 외부에서 공급하는 ‘ 준 외부공급방식’이 채택되었는데 그 주요 지역으로 식민지 조선이 주목되었다. 즉,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조선을 아편의 생산이 거의 없는 대만, 관동주 뿐만 아니라 만주국 전매아편의 공급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의 앵속 재배면적 및 생아편 생산량은 1933년부터 급격히 증가되어 일본세력권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38년부터 조선에서의 앵속 재배면적은 작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증가되었다. 이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전환된 만주국의 아편정책, 그리고 해외로부터의 수입곤란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일본은 계속해서 조선에서의 아편생산량을 증대시켜 인근지역에 공급할 계획이었으나 이는 생산저조라는 결과에 부딪혀 뜻대로 달성되지 못했다. 즉 1939년도와 1940년도에도 계속해서 당초 재배지정면적을 증가시켜 보다 많은 생산량을 확보해 인접한 대만, 관동주, 만주국에 공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생산량이 저조하여 당초 공급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유는 무리한 경작면적 증대와 재배강제때문이었다. 즉, 1938년의 경우는 앵속 경작면적의 무리한 증가로 1호당 아편생산량의 한계문제와 새로운 지역에 대한 시험적 재배라는 원인이 있었고, 1940년의 경우는 기후의 불순과 앵속 지정면적 및 재배지정구역의 급격한 증가에 따른 재배강제로 농민의 저항이 곧 아편생산 및 수납량 저하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이렇듯, 조선에서의 아편생산과 수납이 이와 같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조선산 아편에 대한 기대는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도에 조선산 아편은 기후와 보상가 문제 등의 영향으로 그 생산량이 당초 예상량의 1/3이하로 감소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외환관리에도 불구하고 외국산 아편의 수입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후생성에서는 각 관계관청 간에 협의를 거쳐 터키산 아편을 수입할 수속을 완료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수입루트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41년 이후 조선에서 보상가격의 상향조정과 앵속조합 설립에 따른 강제재배 등의 방법으로 아편 생산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조선은 만주사변 이래 일본 세력권 내 전매제 유지를 위한 수입아편의 대체지로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Ⅴ. 결론
일본 식민지하에서 조선은 아편소비지역으로서 점금정책을 명목으로 한 전매제도가 시행되었던 지역과는 달리 아편의 생산 및 소비가 거의 없었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마약공급지로서, 대규모 아편의 생산 공급지로서 그 역할이 강제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내에 마약이 대거 소비되어 사회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 같은 아편정책은 결국 대륙침략과정에서 획득된 일본의 중국 식민지 유지와 침략전쟁의 재창출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 | 박강 저 | 선인 2008
- 동아시아의 근대 중국과 일본의 개항 그리고 한국 | 홍원표 | 리치바닐라 2014
  • 가격2,2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4.11.09
  • 저작시기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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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4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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