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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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철학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I. 서론

II. 세종 정치의 기초
1. 성숙되어 가는 세종
2. 세종의 학문 탐구
3. 태종의 역할

III. 세종 정치철학의 본질
1. 자연관과 인간관
2. 사회관과 국가관

IV. 세종 정치철학의 성격
1. 인도주의
2. 실용주의
3. 융화주의

V.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강이 해이해질까 걱정된다.” 라고 하여 사회적 질서 유지로서의 기강마저 위협받는 도덕적 다스림의 한계상황에서는 형벌의 사용이 불가피하고 하였다.
법치와 덕치의 융화 정책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는데 우선 관리들에게는 법 족용을 엄정히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정치상황이 경색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일정한 회개와 반성의 과정이 지났다고 생각되면 적극 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법 적용의 형평성에 따라 반대론이 등장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법도에는 권과 경이 있으니 한 쪽에 집착항서는 옳지 않다.”고 말하여 현실적 태도 변화를 위한 명분 확보에 독특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태도는 결국 유능한 인재들을 정치에 적극 동참시켜 그 발절적 결과를 낳게 하는 동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는 일반 범법자들에 대한 경우로서 그들에 대해서도 현실적 태도가 적용되어 사면조치가 추구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세종은 국가적 대사나 자연의 변괴가 있을 때에는 종종 사면을 단행하였다. 세종은 “사면이란 덕의를 선포하여 허물의 더러움을 씻고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라고 하여 덕치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법치를 포기하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즉 반성과 화합의 조치를 단행하더라도 제외되는 대상은 있었는데 그 제외대상 자들은 대역모자, 존속상해자, 살인자, 강도 등으로 나타난다. 국가의 반역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고 그 밖에 존속에 대한 악행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자들로서 그들에게는 스스로 새롭게 해 갈 수 있는 선의지 자체조차도 인정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세종은 정치에 있어서 원근, 상하 등의 관계를 불문하고 준법의 엄정성과 덕화의 유연성을 언제나 상호 보완적으로 적용하였다. 따라서 법치의 현장에서는 항상 그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바 세종 3년 3월 사헌부의 심도원이 물의를 일으킨 신한 임군례를 처형한 후 그의 아들이 아비의 옷을 잡아당겼다는 사실을 지목하여 연좌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더니 “ 심도원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인데 오직 임맹손이 함께 들은 일로 죄가 된다는 것만 알고 그가 아비를 사랑했던 효심은 잊어버렸으니 어찌 법을 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며 효심의 세계를 확인하면서 덕목이야 말로 그 어떠한 형법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웠다.
(2)명분과 실리의 조화
실용주의를 중심 이념으로 행동한 세종에게 있어서 명분과 실리는 상반되는 것이지만 양자 모두 포기 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조화롭게 추구되어야 하였다. 이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세종은 다양한 분야에서 노력하였는데 우선 실리 문제와 가장 민감한 경제적 측면에서는 세종7년 10월 “호조는 돈과 곡물의 출납을 관장하니 소비를 줄이고 씀씀이를 절약하는 것은 실로 옳다.”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거두어들일 줄만 알고 나눌 줄을 모르거나 마땅히 써야함에 쓸 줄을 모르는 것 또한 잘못이다.” 라고 하였다. 전자의 부분은 호조로서 견지해야할 실리 중시의 발언이라면 후자의 부분은 호조의 궁극적 존재의의를 확인하는 명분 중시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지출보다도 수입에 치중하기 쉬운 경제부처에 대해서도 후자와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백성에 대한 공생의 정치적 명분을 구현해 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또한 빌린 곡식의 상환과 탕감의 난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명분과 실리를 조화 시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일방적으로 탕감을 해주거나 반대로 상환만을 강요할 경우 일방에게 가혹하므로 구휼정책을 확대하면서도 전면적인 탕감조치는 취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와 같은 조화는 왕조의 기반을 심화시키는 차원에서도 깊이 작용하였다. 용비어천가를 만들면서 세종은 이를 통한 왕조의 신성한 명예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허구로 작성될 수도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한 사실을 주목하여 그 구체적인 활동 내력을 상세히 파악하여 가사를 짓게하는 등 실리성의 정도를 높이고자 실증의 문제를 중시하면서도 태조, 태종을 포함하여 선대6조까지의 조상들의 신성성과 숭앙심을 더욱 높여 왕조 영속의 명분을 부단히 심화시켰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양자의 조화가 절묘하게 이루어진 사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외교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고 중국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조공의 어려움이 뒤따랐다. 즉 사대 외교의 명분 속에는 국가 경제의 실리 보전이 난제로 남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은 11년에 중국 당국에 직접 요청하여 그 조공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외교적 노력으로 난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외교상의 상호예대라는 명분의식에 근거하여 중국 사신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엄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V. 결론
태종의 비호 하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유교적 문화에 기반을 두고 권력을 안정화 시키는데 주력하였고 타고난 학문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성군의 진면목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정치의 기본에는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당시에 접할 수 있는 서적은 거의 모두 섭렵하면서 그 내용들을 정확히 이해하여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적 지혜를 넓혀가고 있었다. 학문의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적 유용성의 차원에서 각종의 정책을 진행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세종의 정치는 통치는 교육이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점, 정치의 가장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는 인간 존엄성 사상, 실용주의와 융합주의 등으로 특징지을수 있을 것이다. 세종의 이러한 정치적 특징들이 그를 오늘날까지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새로운 정치문화 발전의 모범 모델이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정치적 혼란과 어려움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 위기를 타개하고 온 국민의 신망을 얻을 수 있는 국민의 괴로움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자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던 세종대왕과 같은 지도자가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 참고 문헌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이한우 2003
세종대왕의 정치철학, 조남욱 2001
조선왕조를 이끈 수성(守成)의 리더십, 박현모 2006
세종 -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이한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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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1.16
  • 저작시기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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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92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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