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과 부국강병 [일본 메이지 유신 성립, 일본 국내정치제도 변화, 일본 식산흥업 전개, 일본 사회문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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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메이지유신과 부국강병 [일본 메이지 유신 성립, 일본 국내정치제도 변화, 일본 식산흥업 전개, 일본 사회문화 변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1.메이지(明治)유신의 성립
2.국내정치제도의 변화
3.식산흥업의 전개
4.사회문화의 변화
맺음말

본문내용

의 자유를 허용했다.
하지만 불교승려와 불교도는 비판과 박해를 받았다. 천황 친정제정 일치 등을 주장하며 신도(神道)를 국교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1868년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내렸고, 불교에 대한 공격이 절정에 달했던 1871년에는 수많은 사찰과 불상, 유물이 파괴되었다. 이세 신궁 황실의 조상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제사하는 신궁.
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를 서열화하고 천황이 최고의 제사장이 되고 신직을 정부가 임명한다는 국가 신도 제도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로 신분제가 폐지되어 ‘사민평등’이 실현된 점이다. 판적봉환 후 1871년 형식상 황족을 제외하고는 과거의 신분제가 폐지되고 새롭게 화족(번주와 구게(公卿)), 사족(번사와 옛 막신), 평민(사농공) 신분이 생겨났다. 또 종래의 에타와 히닌 등의 호칭을 없애고, 신분과 직업을 모두 평민과 같게 하였다. 평민들도 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거주나 직업 선택이 자유로워졌다. 또한 신분을 넘어선 혼인이 가능하게 되었고, 문무관리가 되는 것도 인정되었다. 하지만 차별 부락민의 평민화는 형식적인 것 이었을 뿐 여전히 차별은 뿌리 깊게 남아 생업에 압박을 받고 있었고, 거주지의 생활 조건도 개선되지 않아서, 빈곤과 출신 거주지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생활면에서의 개화이다. 국민들의 생활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1872년에는 태음태양력 대신 태양력을 채용하여 1일 24시간, 1주일을 7일로 정하고, 일요일을 휴일로 하는 서양의 7요제도를 도입하였고, 외국 정부의 압력으로 기독교 신앙도 인정하게끔 된다. 신문과 잡지도 속속 간행되었고, 토쿄의 긴자거리에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도로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었다. 서양식 건축은 정부 관청, 은행, 철도역 등에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의복과 머리모양도 변화하는데, 밀려들어오는 서양문명에 의해 일본은 서양문화와 전통문화가 섞여서 서양흉내를 내는 모습 머리는 촘마개를 한 채 양복을 입고, 신발로는 짚신을 신은 모습.
들이 보인다. 유신 정부는 공식 의복을 서양식으로 정하고, 황실은 1872년 말에 서양식 예복을 착용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어서 정부 관리들은 프록 코트를 입고, 군인과 경찰은 제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복식을 널리 보급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무사들이 차던 칼을 못 차게 하는 폐도령도 내려졌다. 머리모양은 1871년 남자에 한해 단발령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라 촘마개 일본 상투머리.
를 자르고 머리를 뒤로 넘긴 남자들의 헤어스타일이 대종을 이루어갔다. 물론 단발령이 정착한 것은 1880년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여자들의 머리형은 여전히 에도 시대의 색채를 간직하고 있었으나 일부 앞서가는 여자의 단발이 생겨나 1872년 여자의 단발을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음식면에서도 그 때까지 먹지 않았던 소고기를 먹게 되어, 도처에 소고기전골집이 생겨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강대국을 건설하려는 열망을 화가라는 직업과 결합시키려 했던 실용적 정신 속에서 1870년대와 1880년대의 주요 화가들은 서양식 유화를 보급하려는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1876년부터 서양미술을 전문 관립 학교에서 가르쳤다. 서양음악은 1880년대에 로쿠메이칸에서 연주되었다. 곧 서양음악은 고상한 교양이 되었으며, 1887년에 설립된 도쿄 음악 학교에서 서양 음악 공부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개화의 세찬 광풍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폐도령이 내려졌을 때 가고시마에서는 \'사쓰마만이라도 칼을 차게 해 달라\'고 탄원하는 사족이 있었고, 구마모토에서는 \'하다못해 무사의 표식으로\'라면서 허리에 목도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서민층과 농촌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통적 관습이 지속되는 곳도 있었고, 농경 생활에서는 음력을 계속 사용하였다.
<맺음말>
미국의 페리에 의해 개국된 이후, 일본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존왕양이 운동, 공무합체 운동, 막부타도 운동, 대정봉환, 왕정복고, 무진전쟁, 판적봉환, 폐번치현, 세이난 전쟁 등등. 이 사이에 일어난 민중 반란과 사족들의 저항을 누르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징병제와 새로운 학제, 조세제도, 경제 부흥책과 문명개화 정책 등 많은 정책이 일사천리로 시행되었다. 즉,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 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천황 중시의 근대적 통일국가 형성에 성공하게 된다.
이 개혁의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우선 권위주의적 성격을 말할 수 있겠다. 능률 위주로 위로부터의 근대화였으므로 국민 개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적 부강을 앞세웠으며, 두 번째로 국수주의적 성격이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神道)를 국교로 하는 등 이른바 \"일본 정신\"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군국주의적 성격이다. 유신을 이륙한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 강압적이고 침략적인 태도로 나왔고, 후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도발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다음 단계가 무력으로 한국을 병합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신과 개혁의 중심 세력이 무사 출신이었으므로 당연한 결과라 보여진다.. .
메이지 유신은 상인·자본가 등의 민족 자본을 배경으로 하고, 서양 열강의 외적 자주 속에서, 위로부터 시도된 정치·경제·사회상의 적극적인 서구화·근대화 운동이었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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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본의 역사>, 앤드류고든 지음, 김우영 옮김, 이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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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2.23
  • 저작시기2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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