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과 A형] 일본의 근대적 금융제도의 도입과 식산흥업정책 : 금융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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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제학과 A형] 일본의 근대적 금융제도의 도입과 식산흥업정책 : 금융제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일본의 근대적 금융제도의 도입
1) 일본 금융제도의 성립과정
2) 일본의 근대적 금융제도의 도입
(1) 텐포 개혁
(2) 료가에상
(3) 데가타의 유통
(4) 가와세의 발달
(5) 다이묘가시(大名貸)
(6) 고메킷테(米切手)
(7) 고요킨(御用金)

2. 식산흥업정책

3. 시사점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교가 설치되어 근대적 학교 교육이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전문 교육 과정으로는 1877년에 도쿄 대학이 설립되었고, 많은 외국인을 교수로 초빙하여 근대적 학문의 발달을 이식하고자 애썼다. 사범 학교, 여자 학교, 산업 학교도 생겨났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慶應義塾) 대학과 니이지마 조가 만든 도오시샤(同志社) 대학 등 특색 있는 사립 학교도 세워졌다.
한편, 종교적으로는 오히려 왕정 복고에 따라 제정 일치적인 이상을 부르짖으며 신불습합의 전통을 부정하고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내려 불교를 배척하고 신도를 국교화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크리스트교의 금지를 주장하는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구미 열강의 강한 비판 앞에 힘없이 무너져 일본 정부도 신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발간도 시작되었고, 1873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 등이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설립하고 『메이로쿠(明六) 잡지』를 발행하면서 각종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에게 근대 사상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문명 개화의 풍조는 생활면에서도 여러 변화를 초래하였는데, 특히 도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양복 착용이 군인이나 관리를 중심으로 퍼져 민간에게도 확대되었고, 서양식 단발(散髮)이 새로운 풍조의 대표로 등장하였다. 도쿄의 긴자(銀座)에는 벽돌 건물이 세워졌고, 가스등과 인력거가 새로운 풍물로 자리잡았다. 1872년에는 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이 도입되었으며, 하루를 24시간제로 바꾸고 일요일 휴무제도 실시되었다. 그 외 국경일도 제정되었는데, 대부분의 국경일이 천황제와 연계시켜 천황의 생일도 국경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복고와 혁신이 공존하는 시대 분위기가 문명 개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3. 시사점
에도시대의 금융업을 논할 때 료가에상을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그 만큼 료가에상이 당시 금융업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시대의 상인들은 자택이나 상점에 대량의 현금을 두지 않고 조금이라도 현금에 여유가 있으면 료가에상에게 맡겼다. 이는 현대의 은행 예금처럼 이자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료가에상에게 예금을 함으로써 상인 자신의 신용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료가에상은 신용도가 높은 상인만을 선별해서 돈을 맡아 주었다. 따라서 료가에상은 상인들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료가에상은 이렇게 맡은 예금과 자기 자본으로 금전을 대부했는데 주로 상인과 다이묘에게 금전을 융통해 주었다. 상인에게 융자할 경우 무담보 신용대부의 형태가 많았다. 물론 신용도가 높은 상인을 대상으로 무담보 신용대부가 이루어졌으나 이와 같은 대부형태는 에도시대의 상인들에게 신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인식시켰다고 볼 수 있다. 료가에상은 여러 가지 형태의 대부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어음인 ‘데가타(手形)’가 발달하게 된다. 다양한 종류의 데가타가 에도시대에 유통되었으며 이러한 데가타의 유통은 금융업의 중심에서 상인들의 신용도를 평가하고 이에 따라 상업 자본을 관리하고 융자했던 료가에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써 에도시대의 상업에서는 자연스럽게 신용 거래가 형성되게 되었다.
이처럼 외상 신용거래를 중심으로 거래가 이루어졌고 또한 선불 신용거래도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도매상 금융은 상인이 료가에상 앞으로 데가타를 발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즉 료가에상의 중재로 상인들은 안심하고 데가타를 발행하고 이를 결제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가타의 유통은 에도시대 상업의 중심지였던 오사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에도 지역에서는 데가타가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그 대신 에도에서는 료가에상을 중개인으로 가와세를 발행하여 오사카의 상인과 같은 원격지의 상인들에게 현금 대신 지불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사카의 도매상인들은 에도의 도매상인에 대해서 상품대금 수취계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에도막부의 공금을 오사카에서 에도로 송금하는데도 가와세가 이용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에도와 오사카간을 비롯하여 원격지간에 상업거래가 촉진되었다. 또한 이러한 원격지간 상업거래의 발달로 인해 에도시대에는 육로와 해로가 많이 만들어져 결국 상품 유통망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Ⅲ. 결론
지금까지 본론에서는 일본의 근대적 금융제도의 도입과 식산흥업정책에 대해 서술해 보았다. 에도시대의 데가타나 가와세가 경제수단으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료가에상의 성립과 제도적 발달이 필요했다. 즉 시장경제 속에서 공적인 신뢰를 얻었던 료가에상을 중개자로서 원거리간이나 지역 내에서 일반적으로 데가타와 가와세가 사용되어짐으로써 원거리간의 지불 상쇄가 가능해 졌으며 지역 내에서도 신용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에도시대에 있어서 경제발전을 촉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근세 일본의 가와세 거래는 어디까지나 국내에 한정되었으며 쇄국정책을 취했던 에도막부 하에서 국제적인 상거래 수단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내의 원거리간 거래, 특히 에도와 오사카간의 가와세 거래는 지금의 외국환 거래와 유사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 미쓰이(三井高維)를 비롯한 학자들의 견해이다. 에도시대의 교통, 통신 등의 제반 사회적 인프라를 고려할 때 당시 에도와 오사카간의 신용 거래는 외국과 거래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료가에상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불편한 현금거래 대신 데가타나 가와세의 형태로 이루어진 신용거래는 일본을 근대국가로 성장하게 하는데 커다란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도시대의 금융업에서 데가타와 가와세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최유길(1990). 일본의 근대적 화폐제도의 성립과정. 한국외국어대 논문집.
박진한(2010). 일본근세의 서민지배와 검약의 정치. 혜안.
김종현(1991). 근대일본경제사.비봉출판사.
고희탁(2009). 일본 근세의 공공적 삶과 윤리. 논형.
라이샤워(1997). 이광섭 역. 일본근대화론. 소화.
나카무라 사토루(2007). 박섭 편저.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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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3.29
  • 저작시기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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