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광해군의 업적
Ⅲ. 광해군의 세도정치
Ⅳ. 광해군의 중립외교
Ⅴ. 광해군의 평가
1.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
2.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Ⅵ. 결론
참고문헌
Ⅱ. 광해군의 업적
Ⅲ. 광해군의 세도정치
Ⅳ. 광해군의 중립외교
Ⅴ. 광해군의 평가
1.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
2.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 존명사대를 위하여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는가? 존명사대는 인조반정의 명분이기도 하였으며 송시열의 북벌론의 명분이기도 하였다. 17세기에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차지했는데도 청나라를 쳐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북벌론이 기승을 부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치주의가 강화되다 보니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지식인 관료들은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16세기 이후의 도학정치(道學政治)에서 절정을 이룬다. 임금이라도 도학에 합당하지 않으면 갈아 치울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임금에게 도학을 강요한다는 것은 도학이 임금의 상투 끝에 올라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지식인 관료들은 도학을 통하여 임금을 좌지우지하였다.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서는 모든 권력이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국왕은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식인 관료들의 분열을 막고 국가의 강한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반역음모나 붕당조성은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극형이 따를 뿐이었다. 왕조체제의 계속성을 위하여 왕통은 절대시 되었고 왕위는 종법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천명(天命)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양반관료의 공동이익을 위한 최소한의 보장장치였다. 이런 면에서 국왕은 양반관료의 수장(首長)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왕은 세습되었고 관료들은 시험을 통하여 뽑았기 때문에 관료가 왕보다 우수하였다. 그들은 교묘한 제도를 만들어 왕권을 제약하였다. 대간(臺諫)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잘못을 목숨을 걸고 간쟁(諫諍)하였고, 경연(經筵)서연(書筵)제도를 통하여 국왕이나 왕세자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였으며, 사관(史官)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인사권과 군사권이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료들에게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료들 사이에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의 당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국왕은 단지 붕당단의 조정을 꾀하는 데 급급하였다. 조선왕조의 국왕 중 어리고 무능한 왕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정국의 소산이다. 정복왕조가 많이 들어서서 황제권이 강한 중국과는 달리 신료들의 권한이 강한 조선에서는 붕당이 공인되다시피 하였다. 중국은 땅이 넓고 민족이 다양하다 보니 황제권에 직접 도전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신료들간의 세력다툼은 용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 주변의 여자들이나 환관의 세력이 강하였다.
참고문헌
◇ 김지욱, 조선조 광해군의 국방정책과 그 교훈,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2003
◇ 신병주, 광해군 시기 의궤의 편찬과 그 성격, 남명학회, 2006
◇ 서연주, 광해군의 국내정책의 의미, 인하대학교, 2005
◇ 이필원, 광해군의 왕권강화책과 그 한계 : 교하천도논의를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2007
◇ 장성진, 광해군 시대 국방정책 연구, 국방대학교, 2009
◇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 광해군 다시 읽기, 한국역사연구회, 1998
문치주의가 강화되다 보니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지식인 관료들은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16세기 이후의 도학정치(道學政治)에서 절정을 이룬다. 임금이라도 도학에 합당하지 않으면 갈아 치울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임금에게 도학을 강요한다는 것은 도학이 임금의 상투 끝에 올라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지식인 관료들은 도학을 통하여 임금을 좌지우지하였다.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서는 모든 권력이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국왕은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식인 관료들의 분열을 막고 국가의 강한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반역음모나 붕당조성은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극형이 따를 뿐이었다. 왕조체제의 계속성을 위하여 왕통은 절대시 되었고 왕위는 종법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천명(天命)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양반관료의 공동이익을 위한 최소한의 보장장치였다. 이런 면에서 국왕은 양반관료의 수장(首長)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왕은 세습되었고 관료들은 시험을 통하여 뽑았기 때문에 관료가 왕보다 우수하였다. 그들은 교묘한 제도를 만들어 왕권을 제약하였다. 대간(臺諫)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잘못을 목숨을 걸고 간쟁(諫諍)하였고, 경연(經筵)서연(書筵)제도를 통하여 국왕이나 왕세자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였으며, 사관(史官)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인사권과 군사권이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료들에게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료들 사이에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의 당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국왕은 단지 붕당단의 조정을 꾀하는 데 급급하였다. 조선왕조의 국왕 중 어리고 무능한 왕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정국의 소산이다. 정복왕조가 많이 들어서서 황제권이 강한 중국과는 달리 신료들의 권한이 강한 조선에서는 붕당이 공인되다시피 하였다. 중국은 땅이 넓고 민족이 다양하다 보니 황제권에 직접 도전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신료들간의 세력다툼은 용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 주변의 여자들이나 환관의 세력이 강하였다.
참고문헌
◇ 김지욱, 조선조 광해군의 국방정책과 그 교훈,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2003
◇ 신병주, 광해군 시기 의궤의 편찬과 그 성격, 남명학회, 2006
◇ 서연주, 광해군의 국내정책의 의미, 인하대학교, 2005
◇ 이필원, 광해군의 왕권강화책과 그 한계 : 교하천도논의를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2007
◇ 장성진, 광해군 시대 국방정책 연구, 국방대학교, 2009
◇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 광해군 다시 읽기, 한국역사연구회, 1998
추천자료
현대일본정치 중간고사 예상문제
통일을 위한 언론의 개혁과 역할
국제 정치에서 세력균형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
통일방안
을사조약은 왜 무효인가 - 한국근현대와 제국주의 -
일본의 국방정책과 동북아시아에 미치는 영향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독일제국의 성립
제1차 세계대전 배경과 진행과정
독이릐 행정과 관료제
[자주국방][국방][안보][한반도안보][안보협력]바람직한 국방비전과 자주국방의 개념, 자주국...
[법학]헌법재판소,국가기관으로서의 위치(정치적 기관인가? 독립된 재판기관인가?)
(결과) 대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 조사 ,spss(Statistical Package for Social Science) ...
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의 행정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