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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emann, 1973
Opera omnia, patrologia latina to 63-64 : Boethius, Jacques P. Migne (ed.), 1860
Boethius:The Consolation of Music, Logic, Theology and Philosophy : H. Chadwick, 1981
Boethius : H. Barrett, 1965
이 항목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면
보이티우스 (로마 철학자·정치가) Boethius, Anicius Manlius Severinus
서양철학사에 기여
논리학
스콜라 철학
스토아 철학
플라톤주의
영향
라틴 문학
음악
초서
보이티우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Copyright ⓒ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All Rights Reserved.
I think
-보이티우스 그는 왜??
요즘 중세철학을 배우면서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처음 중세철학 강의를 들을 때는 단지 철학자들의 생각이 매우 흥미로울 뿐 이였다.
그러나 배우면 배울수록 그들이 왜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려했는지, 한편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나는 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해져 갔다.
이 과제를 하면서, 보이티우스가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들 가운데 어떻게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 복잡한 논변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중세철학자들은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고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믿음이라는 걸 가진 기독교신자로써 나는 얼마나 더 예수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힘썼는지 반성하게 되는 계기도 된 것 같다.
무조건적인 믿음 또한 무지에서 비롯되면 안 될 테니까... 내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다면 전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분명 나또한 알기위해 더 힘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철학자들이 ‘어떤 목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했는가’ 이다.
“목적으로서의 예수 , 수단으로써의 삶”이라는 말이 있다.
이들이 이것을 증명하려했던 목적이 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아니면 타인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하여 증명하려했다면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이 신 위에 존재해, ‘이성적으로’ 신을 바라본다면 그들이 그토록 증명하려하고 알고자 하는 신은 절대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분명 신이 만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바른 관계 정립 - 인간은 신 아래)
나는 생각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신(하나님)’을 위해 ‘이성’을 선용하는 것이다.
Opera omnia, patrologia latina to 63-64 : Boethius, Jacques P. Migne (ed.), 1860
Boethius:The Consolation of Music, Logic, Theology and Philosophy : H. Chadwick, 1981
Boethius : H. Barrett, 1965
이 항목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면
보이티우스 (로마 철학자·정치가) Boethius, Anicius Manlius Severinus
서양철학사에 기여
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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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철학
플라톤주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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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보이티우스 그는 왜??
요즘 중세철학을 배우면서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처음 중세철학 강의를 들을 때는 단지 철학자들의 생각이 매우 흥미로울 뿐 이였다.
그러나 배우면 배울수록 그들이 왜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려했는지, 한편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나는 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해져 갔다.
이 과제를 하면서, 보이티우스가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들 가운데 어떻게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 복잡한 논변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중세철학자들은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고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믿음이라는 걸 가진 기독교신자로써 나는 얼마나 더 예수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힘썼는지 반성하게 되는 계기도 된 것 같다.
무조건적인 믿음 또한 무지에서 비롯되면 안 될 테니까... 내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다면 전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분명 나또한 알기위해 더 힘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철학자들이 ‘어떤 목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했는가’ 이다.
“목적으로서의 예수 , 수단으로써의 삶”이라는 말이 있다.
이들이 이것을 증명하려했던 목적이 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아니면 타인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하여 증명하려했다면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이 신 위에 존재해, ‘이성적으로’ 신을 바라본다면 그들이 그토록 증명하려하고 알고자 하는 신은 절대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분명 신이 만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바른 관계 정립 - 인간은 신 아래)
나는 생각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신(하나님)’을 위해 ‘이성’을 선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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