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서론
본론
1, 프랑스 68 혁명의 발생 배경
2, 5월 운동의 배경과 주요 메시지1) ‘지루한 프랑스’ 2) 마르크스주의 비판과 학생운동의 분파 3) 르페브르의 혁명적 수사
3, 5월 학생운동의 전개와 자기표현 1) 낭테르식 운동의 확산 - “우리 학우를 석방하라!”2) 시위형태와 자기표현 - 바리케이드는 거리를 막지만 길을 열어준다
결론
참고자료
서론
본론
1, 프랑스 68 혁명의 발생 배경
2, 5월 운동의 배경과 주요 메시지1) ‘지루한 프랑스’ 2) 마르크스주의 비판과 학생운동의 분파 3) 르페브르의 혁명적 수사
3, 5월 학생운동의 전개와 자기표현 1) 낭테르식 운동의 확산 - “우리 학우를 석방하라!”2) 시위형태와 자기표현 - 바리케이드는 거리를 막지만 길을 열어준다
결론
참고자료
본문내용
.
다음은 운동이 고양될 시점에서 콘-벤디트가 결정한 방향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만나고, 발언하고, 그들이 하기를 원하는 것을 결정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경찰과 정면충돌할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우리는 운동이 자신의 집단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것을 도우면서 운동과 함께하려 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5월 8일에 있었던 완충기죠 와 제스마르의 성급한 행동을 문제 삼아 5월 10일에는 어떠한 정파도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없게 하는 원칙이 세워졌다. 시위대가 경찰의 봉쇄로 막힌 라틴 구에 도착하였을 때, 콘-벤디트는 이 사실을 여과 없이 시위 대중에게 알렸고, 시위대 중은 동요 없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삼삼오오 나뉘어 토론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기로 했다. 바리케이드는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이었으며, 이 행위가 군사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센 강 왼쪽에 자리 잡은 이들 시위대가 쌓아놓은 바리케이드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세워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진압경찰과 나란히 쌓여 있기도 했다. 이날의 시위 대중에게 중요했던 것은 “각자가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이었을 뿐이다. 또한, 바리케이드를 쌓는 행위로 인해 당시의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전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동일시함으로서 느꼈던 극적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68년의 바리케이드는 전시대 혁명기에 나타났던 군사 전략적인 성격과는 다른 참여자들의 “표현방식”이며, 시위 행동이었다. “바리케이드는 거리를 막지만 길을 열어준다”라는 낙서는 자발적 행위로 인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길을 찾아낸 대중의 상태를 잘 말해준다. 이제 참여자들의 “자발성”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만족을 얻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행동을 통한 의식의 자각’은 이때 생겨난 5월 운동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5월 10일의 밤을 지나면서 “수천의 흩어진 원자화된 군중”이 (일시적으로) “결의에 찬 개인들로 구성된 강고한 대중”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들이 5~6월에 수많은 말들을 쏟아놓게 될 주인공이었다. 자발적으로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억압된 사회 속에서 외부로부터 부여받던 개인의 사고가 자신의 내면에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사회와 그에 순응하던 개인들은 운동이 분출되자마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강력한 사회 대안세력이 존재하던 프랑스에서 자신들의 불만을 대신 처리해주리라 했던 믿음이 깨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들의 언어는 논쟁, 토론을 바탕으로 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모든 말과 표현들의 “병렬적 나열”이라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5월의 힘은 모든 이로 하여금 말을 하게끔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 는 것 이었다 . 5월 운동에 참여 했던 마오 주의자 롤랑 가 정장 로(Roland Castro)는 “내가 느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라며 ‘살아 있다는 것의 충만함’으로 자신의 소감을 회상했다. 5월 10~11일 사이에 있었던 ‘바리케이드의 밤’의 격렬함은 정부로 하여금 주저하게 만들었다. 학생운동에 대한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대통령 드골과 학생 회유를 주장하는 온건한 수상 퐁피두와의 견해차인 정부와 학생 간에 형성되었던 긴장 국면에 다소 이완된 분위기를 창출하였다. “소르본에서의 병력 철수, 구속된 학우 석방, 대학의 재개” 세 가지의 요구조건은 모두 충족되었다. 그러나 운동의 과정에서 개발된 ‘정치적 감성’은 두 번 다시 권위적인 정부에 의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을 방안을 마련하고 싶어했다. 5월 13일 노동자들까지 합세한 “백만 인의 대행진”으로 5월 운동은 더 학생들만의 시위로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5월 3일 낭테르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이 소르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어느 특정 운동세력이 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었다기보다는 학생운동 정파들이 시위대 중의 요구에 맞으면서 이끌어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시위의 형태는 자발적인 대중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계획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이 아닌, 상황에 따른 즉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위는 대중의 자기표현이 풍부해질수록 격렬해졌다.
결론
전후 복구사업이 더욱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추구하면서, 프랑스 사회는 위로부터의 꽉 짜인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보다는 권위 있는 개인의 결정이 중요해졌으며, 대중은 수동적 존재가 되었다. 특히 대학생의 처지는 경제적 능력도 없고 사회적 발언권도 가지지 못하는 20세기의 주변인이었다. 교수-학생의 관계는 가르침을 주고받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엄격함과 경직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당시의 사회는 학생들의 작은 반대에도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5월 운동은 단일 사안에 대한 반대와 그에 대한 대안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 곳곳에 깔린 다양한 모습의 권위주의에 대한 다양한 반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정식화된 혁명 이론을 가진 학생운동 정파들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삶 곳곳에서 말하고 생각할 권리를 잃어버린 대중이었다. 대중은 운동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낙서와 난상토론으로 표출하였고, 이것이 5월 운동의 이미지가 되었다. 또한,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나서기 시작한 대중은 사회를 주도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였다. 1968년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를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은 파리 외곽의 낭테르(Nanterre)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낭테르 대학은 늘어나는 학생 수를 수용하기 위해 서둘러 짓느라 개교 당시 도서관은 공사 중이었고, 등교를 할 수 있는 대중 교통편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열악한 교육환경은 낭테르의 학생운동이 가열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5월 2일 베트남전 반대 시위과정에서 촉발된 학생운동은 국제 연대라는 큰 쟁점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주목하였고, 이것은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참고자료
오늘날의 프랑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다음은 운동이 고양될 시점에서 콘-벤디트가 결정한 방향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만나고, 발언하고, 그들이 하기를 원하는 것을 결정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경찰과 정면충돌할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우리는 운동이 자신의 집단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것을 도우면서 운동과 함께하려 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5월 8일에 있었던 완충기죠 와 제스마르의 성급한 행동을 문제 삼아 5월 10일에는 어떠한 정파도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없게 하는 원칙이 세워졌다. 시위대가 경찰의 봉쇄로 막힌 라틴 구에 도착하였을 때, 콘-벤디트는 이 사실을 여과 없이 시위 대중에게 알렸고, 시위대 중은 동요 없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삼삼오오 나뉘어 토론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기로 했다. 바리케이드는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이었으며, 이 행위가 군사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센 강 왼쪽에 자리 잡은 이들 시위대가 쌓아놓은 바리케이드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세워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진압경찰과 나란히 쌓여 있기도 했다. 이날의 시위 대중에게 중요했던 것은 “각자가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이었을 뿐이다. 또한, 바리케이드를 쌓는 행위로 인해 당시의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전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동일시함으로서 느꼈던 극적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68년의 바리케이드는 전시대 혁명기에 나타났던 군사 전략적인 성격과는 다른 참여자들의 “표현방식”이며, 시위 행동이었다. “바리케이드는 거리를 막지만 길을 열어준다”라는 낙서는 자발적 행위로 인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길을 찾아낸 대중의 상태를 잘 말해준다. 이제 참여자들의 “자발성”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만족을 얻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행동을 통한 의식의 자각’은 이때 생겨난 5월 운동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5월 10일의 밤을 지나면서 “수천의 흩어진 원자화된 군중”이 (일시적으로) “결의에 찬 개인들로 구성된 강고한 대중”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들이 5~6월에 수많은 말들을 쏟아놓게 될 주인공이었다. 자발적으로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억압된 사회 속에서 외부로부터 부여받던 개인의 사고가 자신의 내면에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사회와 그에 순응하던 개인들은 운동이 분출되자마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강력한 사회 대안세력이 존재하던 프랑스에서 자신들의 불만을 대신 처리해주리라 했던 믿음이 깨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들의 언어는 논쟁, 토론을 바탕으로 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모든 말과 표현들의 “병렬적 나열”이라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5월의 힘은 모든 이로 하여금 말을 하게끔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 는 것 이었다 . 5월 운동에 참여 했던 마오 주의자 롤랑 가 정장 로(Roland Castro)는 “내가 느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라며 ‘살아 있다는 것의 충만함’으로 자신의 소감을 회상했다. 5월 10~11일 사이에 있었던 ‘바리케이드의 밤’의 격렬함은 정부로 하여금 주저하게 만들었다. 학생운동에 대한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대통령 드골과 학생 회유를 주장하는 온건한 수상 퐁피두와의 견해차인 정부와 학생 간에 형성되었던 긴장 국면에 다소 이완된 분위기를 창출하였다. “소르본에서의 병력 철수, 구속된 학우 석방, 대학의 재개” 세 가지의 요구조건은 모두 충족되었다. 그러나 운동의 과정에서 개발된 ‘정치적 감성’은 두 번 다시 권위적인 정부에 의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을 방안을 마련하고 싶어했다. 5월 13일 노동자들까지 합세한 “백만 인의 대행진”으로 5월 운동은 더 학생들만의 시위로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5월 3일 낭테르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이 소르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어느 특정 운동세력이 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었다기보다는 학생운동 정파들이 시위대 중의 요구에 맞으면서 이끌어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시위의 형태는 자발적인 대중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계획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이 아닌, 상황에 따른 즉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위는 대중의 자기표현이 풍부해질수록 격렬해졌다.
결론
전후 복구사업이 더욱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추구하면서, 프랑스 사회는 위로부터의 꽉 짜인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보다는 권위 있는 개인의 결정이 중요해졌으며, 대중은 수동적 존재가 되었다. 특히 대학생의 처지는 경제적 능력도 없고 사회적 발언권도 가지지 못하는 20세기의 주변인이었다. 교수-학생의 관계는 가르침을 주고받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엄격함과 경직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당시의 사회는 학생들의 작은 반대에도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5월 운동은 단일 사안에 대한 반대와 그에 대한 대안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 곳곳에 깔린 다양한 모습의 권위주의에 대한 다양한 반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정식화된 혁명 이론을 가진 학생운동 정파들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삶 곳곳에서 말하고 생각할 권리를 잃어버린 대중이었다. 대중은 운동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낙서와 난상토론으로 표출하였고, 이것이 5월 운동의 이미지가 되었다. 또한,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나서기 시작한 대중은 사회를 주도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였다. 1968년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를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은 파리 외곽의 낭테르(Nanterre)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낭테르 대학은 늘어나는 학생 수를 수용하기 위해 서둘러 짓느라 개교 당시 도서관은 공사 중이었고, 등교를 할 수 있는 대중 교통편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열악한 교육환경은 낭테르의 학생운동이 가열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5월 2일 베트남전 반대 시위과정에서 촉발된 학생운동은 국제 연대라는 큰 쟁점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주목하였고, 이것은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참고자료
오늘날의 프랑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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