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한국종교사
들어가는 말
동학의 발생
1862년 농민항쟁의 발생계기
붕당정치의 변질과 정국의 변화
서구자본주의의 침투와 위기의식 고양
수운 최제우
동학사상
결론
나가는 말
참고문헌
한국종교사
들어가는 말
동학의 발생
1862년 농민항쟁의 발생계기
붕당정치의 변질과 정국의 변화
서구자본주의의 침투와 위기의식 고양
수운 최제우
동학사상
결론
나가는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부정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등장하였다는 시각이 있다. 동학이 지향하는 후천개벽 사상에는 지배계층과 피지배 계층이라는 대립의 양상이 내재하게 되고, 나아가 후천개벽은 피지배 계층의 지배 계층에 대한 투쟁을 통한 혁세 또는 혁명의 논리로 발전한다. 또 이와 같은 논의에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민족주의의 논리 역시 담기게 된다. 즉 동학 창도의 배경에는 ‘체제 혁명’을 위한 이념이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논의이다. 그러나 수운 최제우는 당시 사회의 제도나 체제의 문란이 조선조 사회를 부패와 질곡으로 몰아간 것으로 보기보다는, 좀 더 근원적으로 인간의 내적 문제인 윤리적인 타락이 부패와 혼란을 초래하였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서, 최제우는 당면했던 당시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도나 체제의 비판을 통해 그 변혁을 촉구한 것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적, 사회적 윤리를 어떻게 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즉 최제우는 제도나 체제의 변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보다 인간 내면의 문제인 타락한 윤리, 타락한 심성을 한울님의 도와 덕을 통해 회복하여 새로운 삶의 질서를 이룩하고자 동학을 창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동학학술총서>, 2004, 14-15쪽.
나가는 말
천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한국민족 심성형성에 미친 영향과 그 핵심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사상을 통해 개인 구원과 동시에 사회구원을 하고, 이 하늘의 성품을 잘 길러 사람이 하늘과 같다는 놀라운 사실을 구체화시키고자 했다. 천도교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를 가르쳐 당시 사회계급을 타파하고 평등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샤머니즘 같은 신흥종교와는 그 성격을 달리했다. 동학운동은 민중의 삶과 밀착되어 있던 토착 신앙이나 주술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교리나 의례에 수렴하고 있었고, ‘한울님’이라는 신 관념을 통해 신앙대상으로서의 존재를 갈망하던 민중의 종교적 욕구에 부응했다. 또한 기존의 사회질서는 언젠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전개되리라는 혁세사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 도래를 갈망하는 민중의 욕구 또한 충족시켰다. 어춘수, “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의 신비주의”, <가이드포스트>, 2009, 117-118쪽.
동학이 최제우의 순도 이후 불법교단으로서 조선왕조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입도하고 싶을 만큼 농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고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회사상적 요소가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은, 동학의 민족주의와 반외세 반침략 사상이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동학이 지닌 독특한 이론구조의 평등사상이 하위 신분층인 농민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하느님을 하나씩 모시고 있는데, 이 하느님은 신분, 적서, 노주, 남녀, 노소, 빈부에 전혀 차별 없이 모두 똑같은 지고지귀한 하느님인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각각 바로 동일한 하느님을 모시고 있게 때문에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을 동학이 정립한 것이었다. 셋째로, 동학의 ‘사람은 곧 하느님이다’고 하여 인간을 하느님과 동격으로 보는 인시천 사상의 독특한 휴머니즘이 농민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넷째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이 농민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 말기의 농민들은 조선왕조사회의 말세적 현상 속에서 기존 도덕과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어디에서도 정신적 지주를 튼튼히 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동학이 천명이 따라 ‘후천개벽의 새 시대’를 완전히 열어 농민들을 지상신선과 군자로 만들고 국태민안과 태평성세를 가져올 것이라는 후천개벽 사상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용하,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05, 74-80쪽.
동학을 한국 신흥 종교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유교적인 사상이 많이 흐트러지고 왕권이 약화되며 엘리트들의 서학 수용이라는 조선 후기의 특징들 속에 동학은 민족적 identity를 가지고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계급 체계와 신관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개념을 갖게 했다고 본다. 최제우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동양적인 code가 맞는다고 보고, 양반들이 받아들였던 서구 문명과 종교를 대체할 만한 동양적인 종교를 스스로 창시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적 코드로 민중들에게 다가 갔다는 점과 그 시대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미래적인 개념들(예를 들면 평등주의, 어린이를 존중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학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여러 종교를 혼합하여 동학의 사상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동학계 신종교, 증산계 신종교, 미륵게 신종교의 용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제우가 자신을 신격화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다른 신흥종교와는 달리 동학은 철학적 개념이라 이해 될 수도 있겠다.
참고문헌
신용하,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05.
어춘수, “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의 신비주의”, <가이드포스트>, 2009.
홍석, “강좌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1995.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동학학술총서>, 2004.
강만길 외,“중세사회의 해체”, <한국사>, 1994.
김용섭, “조선후기에 있어서 신분제의 동요와 농지점유”, <조선후기농업사연구>,
일조각, 1970.
이경식, “17세기 농지개간과 지주제 전개”, <한국사연구>, 한국사연구회, 1973.
한명기, “사회 세력의 위상과 저항”, <조선정치사>, 청년사, 1990.
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평민사, 1985.
오문환, “수운 최제우”, <예문동양사상 연구원>, 예문서원, 2005.
오문환, “해월 최시형의 정치사상”, <동학학술총서>, 모시는 사람들, 2003.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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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말
천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한국민족 심성형성에 미친 영향과 그 핵심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사상을 통해 개인 구원과 동시에 사회구원을 하고, 이 하늘의 성품을 잘 길러 사람이 하늘과 같다는 놀라운 사실을 구체화시키고자 했다. 천도교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를 가르쳐 당시 사회계급을 타파하고 평등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샤머니즘 같은 신흥종교와는 그 성격을 달리했다. 동학운동은 민중의 삶과 밀착되어 있던 토착 신앙이나 주술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교리나 의례에 수렴하고 있었고, ‘한울님’이라는 신 관념을 통해 신앙대상으로서의 존재를 갈망하던 민중의 종교적 욕구에 부응했다. 또한 기존의 사회질서는 언젠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전개되리라는 혁세사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 도래를 갈망하는 민중의 욕구 또한 충족시켰다. 어춘수, “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의 신비주의”, <가이드포스트>, 2009, 117-118쪽.
동학이 최제우의 순도 이후 불법교단으로서 조선왕조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입도하고 싶을 만큼 농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고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회사상적 요소가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은, 동학의 민족주의와 반외세 반침략 사상이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동학이 지닌 독특한 이론구조의 평등사상이 하위 신분층인 농민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하느님을 하나씩 모시고 있는데, 이 하느님은 신분, 적서, 노주, 남녀, 노소, 빈부에 전혀 차별 없이 모두 똑같은 지고지귀한 하느님인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각각 바로 동일한 하느님을 모시고 있게 때문에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을 동학이 정립한 것이었다. 셋째로, 동학의 ‘사람은 곧 하느님이다’고 하여 인간을 하느님과 동격으로 보는 인시천 사상의 독특한 휴머니즘이 농민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넷째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이 농민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 말기의 농민들은 조선왕조사회의 말세적 현상 속에서 기존 도덕과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어디에서도 정신적 지주를 튼튼히 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동학이 천명이 따라 ‘후천개벽의 새 시대’를 완전히 열어 농민들을 지상신선과 군자로 만들고 국태민안과 태평성세를 가져올 것이라는 후천개벽 사상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용하,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05, 74-80쪽.
동학을 한국 신흥 종교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유교적인 사상이 많이 흐트러지고 왕권이 약화되며 엘리트들의 서학 수용이라는 조선 후기의 특징들 속에 동학은 민족적 identity를 가지고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계급 체계와 신관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개념을 갖게 했다고 본다. 최제우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동양적인 code가 맞는다고 보고, 양반들이 받아들였던 서구 문명과 종교를 대체할 만한 동양적인 종교를 스스로 창시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적 코드로 민중들에게 다가 갔다는 점과 그 시대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미래적인 개념들(예를 들면 평등주의, 어린이를 존중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학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여러 종교를 혼합하여 동학의 사상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동학계 신종교, 증산계 신종교, 미륵게 신종교의 용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제우가 자신을 신격화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다른 신흥종교와는 달리 동학은 철학적 개념이라 이해 될 수도 있겠다.
참고문헌
신용하,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05.
어춘수, “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의 신비주의”, <가이드포스트>, 2009.
홍석, “강좌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1995.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동학학술총서>, 2004.
강만길 외,“중세사회의 해체”, <한국사>, 1994.
김용섭, “조선후기에 있어서 신분제의 동요와 농지점유”, <조선후기농업사연구>,
일조각, 1970.
이경식, “17세기 농지개간과 지주제 전개”, <한국사연구>, 한국사연구회, 1973.
한명기, “사회 세력의 위상과 저항”, <조선정치사>, 청년사, 1990.
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평민사, 1985.
오문환, “수운 최제우”, <예문동양사상 연구원>, 예문서원, 2005.
오문환, “해월 최시형의 정치사상”, <동학학술총서>, 모시는 사람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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