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니다. 비록 천명을 받았다고 하는 왕은 없을지라도 오늘날에도 정부의 권위는 존속하고 있으며 이 권위가 정의롭게 행사될 것과 개인이 이 정부에 대해서 특정한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엄격하게 지켜져야 할 준칙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비록 퇴계의 세계는 아니라 하더라도 퇴계의 절대적인 정직과 그의 사물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부단한 노력의 자세는 우리들의 모범이 된다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말이 아니라, 본인이 진심으로 믿는 바를 말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퇴계학은 계속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컨대 중국인들이 수천년 동안 자연을 관찰하여 정립한 근세유학 우주관의 기본명제 對待개념은 특히 生理律論(biorhythms)의 연구가 성행하고 있는 오늘날의 지적인 풍토에 비추어 보아 매우 현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퇴계의 연구열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종교로 변질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듣기로는 북한에서는 퇴계를 관념론자로 간주하여 배척하는가 하면 그의 철학적 반대자인 율곡은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부합되는 진취적인 유물론자로 해석하여 추앙하고 있다는데, 이와 같은 특정한 인물의 사상을 오늘날의 맑스주의와 같은 그릇된 세계관에 뜯어 맞추려고 하는 연속적인 장난은 논리적 차원에서 수긍될 수도 없는 것일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역사적인 것입니다.
퇴계와 율곡 양자는 다같이 주자학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그들 이론의 상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무시되면 율곡을 숭앙하는 북한이 현대적 노론이 되고 퇴계를 숭앙하는 남한이 현대의 남인이 되어 이조의 당쟁을 현대사회에 재현시킬 위험마져 있습니다. 퇴계와 율곡 양인은 그들의 철학적 교리에 매달려 일어난 당시의 사회를 병들게 만든 정치적 당파싸움을 누구보다도 심하게 개탄했으며, 퇴계는 주자학의 진흥을 통해서, 그리고 율곡은 참정을 통해서 이러한 권력투쟁을 완화시키시 위해 노력했습니다.
-518-
끝으로 본인은 퇴계가 일본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퇴계의 주자학 해석이 原惺窩(1561∼1619), 林羅山(1583∼1657), 山崎闇齋(1618∼82) 등 德川時代의 중요한 초기 일본 유학자들에게 새로운 견식을 주었다는 점 등은 阿部吉雄을 비롯한 몇몇 일본 학자들이 철저하게 다룬 문제입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橫井小楠(1809∼69)과 原田永孚(1818∼91)가 퇴계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元田永孚는 明治天皇에게 유학강론을 한 사람이며, 또 1910년에 공포된 소위 제국교육헌장 속에 포함한 원칙과 문장을 선택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한국사람들도 40이 넘은 분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이 헌장은 일본인들이 준수해야 할 윤리적 규범의 기초는 유교적 도덕이라야 한다는 점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유학자가 기대한 대로 이 헌장은 충성과 효도, 그리고 다른 의무들은 일본 황제와 皇家에만 향하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일본에 수용된 퇴계의 사상이, 1916년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후에는 퇴계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1945년까지만 해도 유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중국전문가나 학자들은 일본이야말로 유교가 살아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본인의 「유교와 현대일본」이라는 책에서도 자세히 검토해 보았지만 상당히 허황되고 위선적인 것으로서, 이는 다만 일본의 유학자들이 그들의 윤리적 신념을 일본제국주의적 요청에 이바지하도록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야말로 공자가 제창한 王道와는 매우 거리가 먼 것입니다.
-519-
본인이 이 점을 언급하는 목적은 퇴계와 같은 진정한 유학자는 그들의 원칙을 벼슬이나 물질적 명예를 위해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현대는 이씨조선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도 행정직과 입법직은 있습니다. 퇴계의 廉直과 헌신적인 봉사정신은 아직도 만인의 귀감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학술회의에 세계각국의 학자들이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퇴계의 사상이 비단 한국에서만 추앙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이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널리 추앙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김 병 재 譯)
그러나 퇴계의 연구열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종교로 변질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듣기로는 북한에서는 퇴계를 관념론자로 간주하여 배척하는가 하면 그의 철학적 반대자인 율곡은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부합되는 진취적인 유물론자로 해석하여 추앙하고 있다는데, 이와 같은 특정한 인물의 사상을 오늘날의 맑스주의와 같은 그릇된 세계관에 뜯어 맞추려고 하는 연속적인 장난은 논리적 차원에서 수긍될 수도 없는 것일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역사적인 것입니다.
퇴계와 율곡 양자는 다같이 주자학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그들 이론의 상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무시되면 율곡을 숭앙하는 북한이 현대적 노론이 되고 퇴계를 숭앙하는 남한이 현대의 남인이 되어 이조의 당쟁을 현대사회에 재현시킬 위험마져 있습니다. 퇴계와 율곡 양인은 그들의 철학적 교리에 매달려 일어난 당시의 사회를 병들게 만든 정치적 당파싸움을 누구보다도 심하게 개탄했으며, 퇴계는 주자학의 진흥을 통해서, 그리고 율곡은 참정을 통해서 이러한 권력투쟁을 완화시키시 위해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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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본인은 퇴계가 일본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퇴계의 주자학 해석이 原惺窩(1561∼1619), 林羅山(1583∼1657), 山崎闇齋(1618∼82) 등 德川時代의 중요한 초기 일본 유학자들에게 새로운 견식을 주었다는 점 등은 阿部吉雄을 비롯한 몇몇 일본 학자들이 철저하게 다룬 문제입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橫井小楠(1809∼69)과 原田永孚(1818∼91)가 퇴계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元田永孚는 明治天皇에게 유학강론을 한 사람이며, 또 1910년에 공포된 소위 제국교육헌장 속에 포함한 원칙과 문장을 선택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한국사람들도 40이 넘은 분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이 헌장은 일본인들이 준수해야 할 윤리적 규범의 기초는 유교적 도덕이라야 한다는 점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유학자가 기대한 대로 이 헌장은 충성과 효도, 그리고 다른 의무들은 일본 황제와 皇家에만 향하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일본에 수용된 퇴계의 사상이, 1916년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후에는 퇴계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1945년까지만 해도 유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중국전문가나 학자들은 일본이야말로 유교가 살아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본인의 「유교와 현대일본」이라는 책에서도 자세히 검토해 보았지만 상당히 허황되고 위선적인 것으로서, 이는 다만 일본의 유학자들이 그들의 윤리적 신념을 일본제국주의적 요청에 이바지하도록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야말로 공자가 제창한 王道와는 매우 거리가 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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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이 점을 언급하는 목적은 퇴계와 같은 진정한 유학자는 그들의 원칙을 벼슬이나 물질적 명예를 위해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현대는 이씨조선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도 행정직과 입법직은 있습니다. 퇴계의 廉直과 헌신적인 봉사정신은 아직도 만인의 귀감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학술회의에 세계각국의 학자들이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퇴계의 사상이 비단 한국에서만 추앙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이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널리 추앙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김 병 재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