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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 p.35)
-45-
주로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발간되었던 한국 잡지에 실렸던 논설은 조금 나은 편이다. 1917년 7월판은 『孔子 숭배』에 관해 일반적 용어로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숭배 의식이 일년에 두 번씩 한국에서 거행된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東아시아권 독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李滉을 소개한 최초의 인물은 ―적어도 내가 보았던 자료들로 미루어 보건대― 제임스 스카쓰 게일이었다. 1972년 서울에서 출판된, 그가 1936년에 쓴 『韓國人의 역사』는 다른 점에서도 그러하나, 이런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李滉을 중요한 유학자나 혹은 그가 흔히 그렇게 불렸던 한국의 孔子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제임스 스카쓰 게일은 그를 그의 시대의 위대한 인물로 보았으나,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렇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400년 후에(1550) 隱者 李(Yi)에 관해서, 당시의 가장 위대한 학자였던 李滉은 청평 언덕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로 곧바로 관직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영화로웠으나, 그는 그것을 버리고 그가 37년간 수도한 이 언덕들로 왔다. 그는 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으나 그의 마음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결함을 찾아내려는 많은 말과 글들을 보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보다 우월했다. 세상에서의 최상의 제의를 거부한채 삶을 살아간 것은 그가 가장 희귀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증거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명성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말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하려고만 했다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명성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적 위대성으로 인해 그는 그렇게 했으며, 초야에 묻혀 결코 꿈꾸지 못한 기쁨을 누렸다. 그의 비할 바 없는 가치는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李滉은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은 시로 끝맺고 있다 ;
-46-
<강 저편 너머로, 그 언덕들이 떠오른다.
내 사다리는 그 어지러운 길로 나를 인도해 주리
시냇물이 찰랑거리는 곳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이 廬山 언덕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그 大家는 자그마한 밭을 갈았다.
달이 모든 빈 하늘을 채우듯이
그의 마음은 우리와 함께 있다.
거미집이 훗날 흔적을 남기지 못하듯이
세상의 영광은 그에게 그러했다.
이제 누가 그의 얘기를 쓰겠는가!
그의 꾸밈없는 삶의 영상이 너의 눈에 떠오르지 않느냐?>
(pp.191-92)
이 단 한번의 언급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전부이다. 정말 충격적인 결과이다.
1945년 이후의 유럽언어권 문학에는 급진적인 변혁이 없었으므로, 오늘날에도 16세기 한국의 다측면적인 지적 생활에 관해 알려진 것이 극히 조금밖에 없으며, 그 결과 중요한 학자인 李滉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退溪學에 관한 계속되는 會議가 이런 상황을 개선시켜 주리라는 정당한 희망을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47-
(구 자 숙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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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발간되었던 한국 잡지에 실렸던 논설은 조금 나은 편이다. 1917년 7월판은 『孔子 숭배』에 관해 일반적 용어로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숭배 의식이 일년에 두 번씩 한국에서 거행된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東아시아권 독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李滉을 소개한 최초의 인물은 ―적어도 내가 보았던 자료들로 미루어 보건대― 제임스 스카쓰 게일이었다. 1972년 서울에서 출판된, 그가 1936년에 쓴 『韓國人의 역사』는 다른 점에서도 그러하나, 이런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李滉을 중요한 유학자나 혹은 그가 흔히 그렇게 불렸던 한국의 孔子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제임스 스카쓰 게일은 그를 그의 시대의 위대한 인물로 보았으나,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렇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400년 후에(1550) 隱者 李(Yi)에 관해서, 당시의 가장 위대한 학자였던 李滉은 청평 언덕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로 곧바로 관직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영화로웠으나, 그는 그것을 버리고 그가 37년간 수도한 이 언덕들로 왔다. 그는 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으나 그의 마음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결함을 찾아내려는 많은 말과 글들을 보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보다 우월했다. 세상에서의 최상의 제의를 거부한채 삶을 살아간 것은 그가 가장 희귀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증거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명성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말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하려고만 했다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명성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적 위대성으로 인해 그는 그렇게 했으며, 초야에 묻혀 결코 꿈꾸지 못한 기쁨을 누렸다. 그의 비할 바 없는 가치는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李滉은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은 시로 끝맺고 있다 ;
-46-
<강 저편 너머로, 그 언덕들이 떠오른다.
내 사다리는 그 어지러운 길로 나를 인도해 주리
시냇물이 찰랑거리는 곳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이 廬山 언덕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그 大家는 자그마한 밭을 갈았다.
달이 모든 빈 하늘을 채우듯이
그의 마음은 우리와 함께 있다.
거미집이 훗날 흔적을 남기지 못하듯이
세상의 영광은 그에게 그러했다.
이제 누가 그의 얘기를 쓰겠는가!
그의 꾸밈없는 삶의 영상이 너의 눈에 떠오르지 않느냐?>
(pp.191-92)
이 단 한번의 언급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전부이다. 정말 충격적인 결과이다.
1945년 이후의 유럽언어권 문학에는 급진적인 변혁이 없었으므로, 오늘날에도 16세기 한국의 다측면적인 지적 생활에 관해 알려진 것이 극히 조금밖에 없으며, 그 결과 중요한 학자인 李滉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退溪學에 관한 계속되는 會議가 이런 상황을 개선시켜 주리라는 정당한 희망을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47-
(구 자 숙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