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는 않는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실제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시는, 불러 주시는, 취급하시는 사역이다.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역사의 좌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죄성과 죄된 습관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부패 때문에 선한 것을 온전히 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을 하려고 하기도 한다." 실제로 죄를 피하고 선과 의를 행하는 일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처음에 인용했던 신도게요의 한 부분은 신자의 삶을 전쟁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욕구와 내주하시는 성령의 욕구의 전쟁.
거룩하다는 인정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실제적인 거룩, 완전한 거룩은 아직 미래에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죽음을 통과하여 영화로운 상태에 들어갈 때 겨우 주어진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새 생명을 부여받아 이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신앙의 강약이 있고, 신앙에도 젖만 먹는 아이같은 신자가 있는가 하면(고전 3:1-2), 약한 사람도 있다(롬 14:1-2; 15:1).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확고한 신앙과 자발적인 선행, 성령에 붙들린 삶, 그리고 기독교적 성숙한 인격에 도달하기 위하여 기독교 교육은 성화에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것이 설교의 형태이든, 성경공부의 형태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교육적 형태로 나타나든지 교육은 성화를 이루는 중요한 필수적 수단이다.
성화를 위한 교육의 자료들
성화를 위한 교육을 서술할 때 이미 암시되었듯이 성경은 그 필수적인 도구이다. 이 말을 몇 가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첫째, 신약성경은 전도를 위해서 만이 아니라 성화를 위한 교육에 그대로 적용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로마서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내용은 이 책들이 기록된 당시의 교회와 교인의 성화를 목적으로 기록된 책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현대 교회의 상황에도 적합한 내용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당시의 문화적 요소와 문화적 명령들이 들어 있음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또 당시의 여러 가지 문학적 표현기법들 즉 비유법, 과장법, 상징법 등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성경해석학적 도구가 동원되어야 함을 부정하는 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성도들을 위한 도덕적, 영적, 신앙적 교훈들은 오늘날에도 문자적으로 계속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둘째,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의존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즉 구약성경의 역사적 부분은 성도들의 삶의 모범으로써 여전히 그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의식이나 의식과 관계된 계명들은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그 예표적 기능들이 다 이루어졌다. 따라서 더 이상 신자들의 삶을 구속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다만 그리스도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사회적, 민족적 특성 하에 주어졌던 정치적 목적의 계명들은 민족과 국가의 장벽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철폐된 지금 더 이상 사회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도덕법 내지 기독교적 가치의 규칙으로 승화된 틀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성도들의 삶을 통제하는 기능을 가진다. 개인의 삶, 악과 선, 의와 불의를 규정한 소위 도덕법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완성시키신 모형대로 더 강화된 형태의 구속력을 가진다.
셋째, 성경에서 추출되는 원리에 근거하여 현실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들을 교회가 연구하여 교육에 사용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원리로서 '사랑', '겸손', '봉사' '선으로 악을 이김' 등을 제시한다.
맺는 말
어떤 사람이 회심/중생한 피교육자인가를 진단하는 것은 지적, 감정적, 의지적 시험으로만은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자에게 중생 여부를 판단하는 별다른 기능이나 기술,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때로는 피교육자 자신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이 시작되는 중생의 순간을 포착하거나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 즉 신약성경의 원리나 모범에 적합하도록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것을 중심으로 회심/중생/믿음을 추정하고 성화를 위한 교육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회심 이후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중생한 사람이라는 판단에 교육자의 독단이 개입하기 쉽고, 이 독단적 판단에 따라 피교육자는 타의적, 인위적으로 전도의 대상에 혹은 교육의 대상에, 혹은 - 광의의 교육 개념으로 보면 - 회심/믿음을 위한 교육의 대상에 혹은 성화를 위한 교육의 대상에 소속되어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모호함은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교육이 끝난 다음에도 조금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설교자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다 그의 청중에게서 예상해야 하는 것처럼,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즉 교육자는 성화를 위한 교육만이 아니라 회심을 위한 전도에도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교육과 전도가 신약성경에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교육을 전도로 전도를 교육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중생과 성화가 논리적, 신학적으로 붙어 있는 개념임을 감안하면 이런 방식의 교육적 목표는 절대로 애매하거나 무리한 것이 아니다.
교육자는 전도와 교육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피교육자의 회심/믿음과 성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생명은 태어 나는 순간부터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태어나는 순간을 위한 준비는 살아가기 위한 준비이며 동시에 살아가기 위한 준비는 태어나도록 하는 준비와 함께 병행될 수 밖에 없다.
이 모두를 우리는 믿는 자로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숙한 인격을 형성해 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주체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교육자는 성령에 붙들리기 위하여 그리고 그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회심/성화의 도구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준비하며 사역해야 한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실제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시는, 불러 주시는, 취급하시는 사역이다.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역사의 좌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죄성과 죄된 습관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부패 때문에 선한 것을 온전히 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을 하려고 하기도 한다." 실제로 죄를 피하고 선과 의를 행하는 일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처음에 인용했던 신도게요의 한 부분은 신자의 삶을 전쟁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욕구와 내주하시는 성령의 욕구의 전쟁.
거룩하다는 인정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실제적인 거룩, 완전한 거룩은 아직 미래에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죽음을 통과하여 영화로운 상태에 들어갈 때 겨우 주어진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새 생명을 부여받아 이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신앙의 강약이 있고, 신앙에도 젖만 먹는 아이같은 신자가 있는가 하면(고전 3:1-2), 약한 사람도 있다(롬 14:1-2; 15:1).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확고한 신앙과 자발적인 선행, 성령에 붙들린 삶, 그리고 기독교적 성숙한 인격에 도달하기 위하여 기독교 교육은 성화에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것이 설교의 형태이든, 성경공부의 형태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교육적 형태로 나타나든지 교육은 성화를 이루는 중요한 필수적 수단이다.
성화를 위한 교육의 자료들
성화를 위한 교육을 서술할 때 이미 암시되었듯이 성경은 그 필수적인 도구이다. 이 말을 몇 가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첫째, 신약성경은 전도를 위해서 만이 아니라 성화를 위한 교육에 그대로 적용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로마서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내용은 이 책들이 기록된 당시의 교회와 교인의 성화를 목적으로 기록된 책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현대 교회의 상황에도 적합한 내용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당시의 문화적 요소와 문화적 명령들이 들어 있음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또 당시의 여러 가지 문학적 표현기법들 즉 비유법, 과장법, 상징법 등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성경해석학적 도구가 동원되어야 함을 부정하는 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성도들을 위한 도덕적, 영적, 신앙적 교훈들은 오늘날에도 문자적으로 계속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둘째,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의존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즉 구약성경의 역사적 부분은 성도들의 삶의 모범으로써 여전히 그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의식이나 의식과 관계된 계명들은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그 예표적 기능들이 다 이루어졌다. 따라서 더 이상 신자들의 삶을 구속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다만 그리스도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사회적, 민족적 특성 하에 주어졌던 정치적 목적의 계명들은 민족과 국가의 장벽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철폐된 지금 더 이상 사회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도덕법 내지 기독교적 가치의 규칙으로 승화된 틀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성도들의 삶을 통제하는 기능을 가진다. 개인의 삶, 악과 선, 의와 불의를 규정한 소위 도덕법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완성시키신 모형대로 더 강화된 형태의 구속력을 가진다.
셋째, 성경에서 추출되는 원리에 근거하여 현실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들을 교회가 연구하여 교육에 사용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원리로서 '사랑', '겸손', '봉사' '선으로 악을 이김' 등을 제시한다.
맺는 말
어떤 사람이 회심/중생한 피교육자인가를 진단하는 것은 지적, 감정적, 의지적 시험으로만은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자에게 중생 여부를 판단하는 별다른 기능이나 기술,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때로는 피교육자 자신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이 시작되는 중생의 순간을 포착하거나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 즉 신약성경의 원리나 모범에 적합하도록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것을 중심으로 회심/중생/믿음을 추정하고 성화를 위한 교육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회심 이후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중생한 사람이라는 판단에 교육자의 독단이 개입하기 쉽고, 이 독단적 판단에 따라 피교육자는 타의적, 인위적으로 전도의 대상에 혹은 교육의 대상에, 혹은 - 광의의 교육 개념으로 보면 - 회심/믿음을 위한 교육의 대상에 혹은 성화를 위한 교육의 대상에 소속되어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모호함은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교육이 끝난 다음에도 조금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설교자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다 그의 청중에게서 예상해야 하는 것처럼,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즉 교육자는 성화를 위한 교육만이 아니라 회심을 위한 전도에도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교육과 전도가 신약성경에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교육을 전도로 전도를 교육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중생과 성화가 논리적, 신학적으로 붙어 있는 개념임을 감안하면 이런 방식의 교육적 목표는 절대로 애매하거나 무리한 것이 아니다.
교육자는 전도와 교육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피교육자의 회심/믿음과 성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생명은 태어 나는 순간부터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태어나는 순간을 위한 준비는 살아가기 위한 준비이며 동시에 살아가기 위한 준비는 태어나도록 하는 준비와 함께 병행될 수 밖에 없다.
이 모두를 우리는 믿는 자로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숙한 인격을 형성해 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주체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교육자는 성령에 붙들리기 위하여 그리고 그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회심/성화의 도구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준비하며 사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