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강조했다. 당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너무 개인쪽으로 치중한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는다. 공동체와 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서구가 발전할수록 개인주의가 더 발전을 한다. 점점 신앙적으로 개인의 신앙이 강조된다. 경건주의의 흐름이 부흥운동으로 갈수록 개인의 신앙체험이 강조되었다. 시대의 조류와 맞으면서 개신교신앙이 개인주의적으로 흘러갔다고 현교수님은 얘기하신다. 교회안에서의 개인주의를 한번 연구해 봄이 재미있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기복주의와 연결이 되면서 매우 좋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 것 같다.
현대신학...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신학자로서 성령과 공동체를 말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타락한 인간이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 오리지날 rightousness를 개발할 수 없다. (원의)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히 그것을 자신 안에서 실현하였다. 교리와 말씀을 가르쳐서 그런게 아니고 인격적인 사귐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정신으로 이해했다. 성령께서 각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느끼게 하는 경우도 있는 일이다. 성령이 공동체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성령이해는 너무 내재적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이라는 사실은 간과되고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다양한 은사를 주는 것이 성령이라고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다르면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것은 성령이 아니다. 공동체정신 같이 같은 것들이 성령이다라고 말한다.
마틴부버의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 물론, 부버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유대교철학자이다.
본회퍼는 부버를 이용하지 않는다. 인격주의를 말하는 철학자들은 많이 있으므로... 성령과 공동체적 관련성을 인격주의를 도입해서 설명을 한다. 그가 이것을 말할 때... 인격주의를 도입했다.
신 , 주 객 , 나 그것
관념론에서는 주체가 객체를 파악함에 의해서 주체로 돌아오는... 신의 세계로 올리면 그것이라고 하지 않고 너로 바꾼다. 인격적인 관계이다. 나의 인식활동에 의해서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너로 바꾸는 것이다. '너'는 또 하나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주체성으로 너를 처분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주체를 대상으로 세웠다는 것은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는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래서는 공동체가 제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체의 인격성은 너에 의해서 세워진다. <= 인격주의철학의 주장... 본회퍼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의 인격은 네가 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을 세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너를 존중할 인격적 타자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다. 각개인의 개인적인 인격을 존중함과 동시에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타자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가 없다. 이기적으로 움직이기에 죄인들의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교회를 통해서 바꾸어 가신다.
본회퍼는 나중에 나치에 저항하는 작업들을 하면서 신학적인 작업을 하지는 못했다.
창조적영성, 사회적 영성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기독교공동체뿐 아니라 정치경제, 창조세계와도 관계가 있다라는 주장. 성령이 정말 관계가 있는가?
많지는 않지만 그런 구절들이 있다. 이사야에 많은 내용이 나온다. 야훼샬롬의 비젼, 하나님의 루아흐, 메시야의 세계... 심지어 피조물조차도 새로워지는 비젼을 보여준다.
사61장에 보면 '야웨의 은혜의 해' 구약의 희년개념에 상응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라를 위해서 선동을 하시거나 폭력을 사용하시지 않았다. 행에서는 자발적인 희년이 나타난다.
레25장 희년, 토지법 - 이스라엘의 토지법은 참 묘하다. 이 토지법을 실천만 할 수 있다면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한 사회가 가능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는 극단의 문제점이다.
특징은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다만 사용권만 인정될 뿐이다. 팔경우에도 땅을 팔 수는 없다 사용권만을 판다. 그래도 희년이 되면 그땅은 돌아온다.
Henry George는 성서의 토지법개념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세금을 모두 하나로 통일하자. 토지단일세를 주장하였다. 부익부빈익빈의 근본은 토지를 불과 소수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거운 세금이 무서워서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 가지게 된다.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을 읽어보라. 헨리죠지협회도 있다. 토레이신부도 이것을 전파하려고 애썼다.
해방운동과 성령.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정치적인 해방만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영성을 이야기 한다. 해방의 영성... 과거에 말하는 영성과는 많이 다르다. 구티에레즈의 영성은 너무 그쪽으로 간다. 압제받는 사람들과의 연대하는 것이 회심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측면도 무시될 수는 없는 일이다.
몰트만도 하나님을 해방자로 본다. 성령을 해방의 영으로 본다. '생명의 영'에서도 성령을 우주적인 성화까지 생각한다.
미하엘 벨콥은 영의 다원주의를 말한다. 여러 종류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실. 성령의 역사. 민감한 성령론을 이사람이 얘기한다. 영의 공적인 인격 - 구성원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동료피조물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성령의 공적인격. 공적인 영역에 관련되어 있다. resonance이다. 단순히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메아리, 반향이 성령이다. 383쪽 인용... 그러한 방향이 그리스도의 공적인격을 형성한다라고 하면 어디까지가 사람, 성령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시도들은 오늘날.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서적으로도 성령의 역사의 범위가 개인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과 사회적 인격성화
지속적으로 성령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열매는 새로운 영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구조이다. 그게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라는 말을 사회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신학...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신학자로서 성령과 공동체를 말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타락한 인간이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 오리지날 rightousness를 개발할 수 없다. (원의)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히 그것을 자신 안에서 실현하였다. 교리와 말씀을 가르쳐서 그런게 아니고 인격적인 사귐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정신으로 이해했다. 성령께서 각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느끼게 하는 경우도 있는 일이다. 성령이 공동체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성령이해는 너무 내재적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이라는 사실은 간과되고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다양한 은사를 주는 것이 성령이라고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다르면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것은 성령이 아니다. 공동체정신 같이 같은 것들이 성령이다라고 말한다.
마틴부버의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 물론, 부버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유대교철학자이다.
본회퍼는 부버를 이용하지 않는다. 인격주의를 말하는 철학자들은 많이 있으므로... 성령과 공동체적 관련성을 인격주의를 도입해서 설명을 한다. 그가 이것을 말할 때... 인격주의를 도입했다.
신 , 주 객 , 나 그것
관념론에서는 주체가 객체를 파악함에 의해서 주체로 돌아오는... 신의 세계로 올리면 그것이라고 하지 않고 너로 바꾼다. 인격적인 관계이다. 나의 인식활동에 의해서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너로 바꾸는 것이다. '너'는 또 하나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주체성으로 너를 처분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주체를 대상으로 세웠다는 것은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는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래서는 공동체가 제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체의 인격성은 너에 의해서 세워진다. <= 인격주의철학의 주장... 본회퍼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의 인격은 네가 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을 세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너를 존중할 인격적 타자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다. 각개인의 개인적인 인격을 존중함과 동시에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타자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가 없다. 이기적으로 움직이기에 죄인들의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교회를 통해서 바꾸어 가신다.
본회퍼는 나중에 나치에 저항하는 작업들을 하면서 신학적인 작업을 하지는 못했다.
창조적영성, 사회적 영성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기독교공동체뿐 아니라 정치경제, 창조세계와도 관계가 있다라는 주장. 성령이 정말 관계가 있는가?
많지는 않지만 그런 구절들이 있다. 이사야에 많은 내용이 나온다. 야훼샬롬의 비젼, 하나님의 루아흐, 메시야의 세계... 심지어 피조물조차도 새로워지는 비젼을 보여준다.
사61장에 보면 '야웨의 은혜의 해' 구약의 희년개념에 상응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라를 위해서 선동을 하시거나 폭력을 사용하시지 않았다. 행에서는 자발적인 희년이 나타난다.
레25장 희년, 토지법 - 이스라엘의 토지법은 참 묘하다. 이 토지법을 실천만 할 수 있다면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한 사회가 가능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는 극단의 문제점이다.
특징은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다만 사용권만 인정될 뿐이다. 팔경우에도 땅을 팔 수는 없다 사용권만을 판다. 그래도 희년이 되면 그땅은 돌아온다.
Henry George는 성서의 토지법개념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세금을 모두 하나로 통일하자. 토지단일세를 주장하였다. 부익부빈익빈의 근본은 토지를 불과 소수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거운 세금이 무서워서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 가지게 된다.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을 읽어보라. 헨리죠지협회도 있다. 토레이신부도 이것을 전파하려고 애썼다.
해방운동과 성령.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정치적인 해방만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영성을 이야기 한다. 해방의 영성... 과거에 말하는 영성과는 많이 다르다. 구티에레즈의 영성은 너무 그쪽으로 간다. 압제받는 사람들과의 연대하는 것이 회심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측면도 무시될 수는 없는 일이다.
몰트만도 하나님을 해방자로 본다. 성령을 해방의 영으로 본다. '생명의 영'에서도 성령을 우주적인 성화까지 생각한다.
미하엘 벨콥은 영의 다원주의를 말한다. 여러 종류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실. 성령의 역사. 민감한 성령론을 이사람이 얘기한다. 영의 공적인 인격 - 구성원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동료피조물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성령의 공적인격. 공적인 영역에 관련되어 있다. resonance이다. 단순히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메아리, 반향이 성령이다. 383쪽 인용... 그러한 방향이 그리스도의 공적인격을 형성한다라고 하면 어디까지가 사람, 성령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시도들은 오늘날.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서적으로도 성령의 역사의 범위가 개인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과 사회적 인격성화
지속적으로 성령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열매는 새로운 영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구조이다. 그게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라는 말을 사회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