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부, 신학과 해방
제 1 장, 신학 : 비판적 사색
제2장, 해방과 개발
제 2 부, 문제제기
제 3 장, 문제 제기의 과정
제 4 장, 제시된 해답
제 5 장, 교회와 세계를 양분한 데서 초래된 위기
제 3 부,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당면과제
제 6 장,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운동
제 7 장, 해방운동과 교회
제 8 장, 교회의 당면과제
제 4 부, 해방의 신학(전편:신앙과 신인간)
제9장, 구원과 해방
제 10 장, 역사의 하느님
제 11 장, 종말론과 정치
제 1 장, 신학 : 비판적 사색
제2장, 해방과 개발
제 2 부, 문제제기
제 3 장, 문제 제기의 과정
제 4 장, 제시된 해답
제 5 장, 교회와 세계를 양분한 데서 초래된 위기
제 3 부,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당면과제
제 6 장,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운동
제 7 장, 해방운동과 교회
제 8 장, 교회의 당면과제
제 4 부, 해방의 신학(전편:신앙과 신인간)
제9장, 구원과 해방
제 10 장, 역사의 하느님
제 11 장, 종말론과 정치
본문내용
절하는 것, 인간실존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덕은 굶주린 이를 먹여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등의 구체적인 행동으로써만 존립한다. 사랑의 덕은 필연적으로 인간간의 관계에서 발생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들을 거쳐 하느님께 당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불가피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위해서, 해방신학에서는 인류안의 하느님의 현존, 인간 개개인 안의 하느님의 현존의 사상을 주장한다. 우리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뵙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웃'에 대한 정의인데, 이웃을 개별적 인간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웃'이라고 할 때는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 그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소인들을 포괄하는 인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착취당하는 사회계급, 지배당하는 국민, 변두리로 밀려난 인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세뉘의 주장대로 대중 역시 우리의 '이웃'이며 따라서 '너와 나의 관계'라는 개인주의적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다. 비오12세의 표현을 따른다면, 오늘날의 사랑의 덕은 '정치적 사랑' 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웃에게 취하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위한 우리의 현실참여가 곧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실존을 부합시키고 있느냐 않느냐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해방의 영성 / 영성이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복음을 생활에 옮기는 구체적인 방도이다. 영성은 만인들과 유대를 이루어 "주님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며, "주님을 모시고" 인간들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해방의 영성은 이웃을 향한 회심을 골자로 한다. 복음적 회심은 모든 영성의 시금석이며, 회심은 우리 자신의 철저한 변혁을 뜻한다. 회개한다는 것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의 해방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이다. 이 회개는 하나의 항속적 과정이다. 만약 회심하려고 하는 자는 우리네 사고방식과 결별해야 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고, 주님과 일치하는 방법도 달리해야 한다. 우리네 문화, 우리가 속한 사회계급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이웃을 향하는 회심, 사회정의와 역사를 향하는 회심만으로 할 바를 다했다고 하지 못한다. 거기에다가 사회적 투쟁과 노력의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평화를 찾아내는 방도를 강구하는 일이 더해져야 한다.
해방의 영성은 아나빔(야훼의 가난한 이들)의 영성을 기반으로 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해방의 영성의 진로는 신학적 사변보다도 생생한 체험으로 인하여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제 11 장, 종말론과 정치
인간의 현실참여는 장차 올 미래를 향하는 행위이다. 현대세계는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로 가득차 있다. 역사는 돌연 속도를 빨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발맞추어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새로운 인간을 출현시키려는 진지한 염원이 이 대륙에서 일고 있는 해방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메델린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우리는 바야흐로 이 대륙의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완전한 자유, 모든 형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개인적 성숙과 집단적 통합을 추구하는 열성이 충만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러한 표징들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려 는 첫 진통을 감지하는 것이다. -
후편 -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새로운 사회
많은 크리스챤들은 자기네가 어떻게 하면 시대의 뜻에 맞는 교회를 이룰 수 있는가에 고심하고 있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정치영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이제, 교회는 철저한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고, 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 크리스챤들의 견해이다.
교회는 이제 두가지의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 첫째, 교회의 존재의의와 세계에 대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둘째, 교회의 이 사명을 수행키 위한 일차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은 어떤 것인가.
이제 교회에게는 보다 새로운 교회의식과 세계안의 교회의 사명에 관한 재정의가 요구된다.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의 교회 :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의지를 무조건 긍정하게 됨으로써 세계안의 교회의 사명을 파악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교회의 존재목적이 "천국을 보장하는" 뜻에서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님을 지금은 누구나 알게 되었다. 구원사업은 역사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실재인 것이다.
이제 구티에즈의 교회론은 오로지 "구원사업과 교회의 활동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관 / 이제 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의 유일한 장으로 자처하기를 중단하고, 인간들에게 바치는 새롭고도 철두철미한 봉사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활동과 성령의 역사야말로 구원경륜의 혁신임을 새삼 각성할 필요가 있다. (과연 그럴까?)
4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으며, 교부들은 구원의 보편의지를 교의로 가르쳤고, 중세에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라고 단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중세에는 교회라는 울타리 밖에서도 진리의 편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무시되었다. 그러면서, 교회가 기존세력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만사를 자기본위로 생각하게 되었고, 공권력과 결탁하게 되었으며, 자기만이 구원의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내부에서부터 붕괴되면서 교회는 새로운 인간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 전반을 지나고, 금세기가 되면서, 2차바티칸 공의회는 구원의 보편의지를 전적으로 수긍하는 노선을 취하고, 교회본위의 사고방식에서 연역해 낸,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이론과 사목지침에 종지부를 찍었다.
성사와 표지 / 2차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성사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사의 개념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교회를 구원사업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또 교회본위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용어를 구사하여 교회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들을 거쳐 하느님께 당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불가피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위해서, 해방신학에서는 인류안의 하느님의 현존, 인간 개개인 안의 하느님의 현존의 사상을 주장한다. 우리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뵙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웃'에 대한 정의인데, 이웃을 개별적 인간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웃'이라고 할 때는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 그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소인들을 포괄하는 인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착취당하는 사회계급, 지배당하는 국민, 변두리로 밀려난 인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세뉘의 주장대로 대중 역시 우리의 '이웃'이며 따라서 '너와 나의 관계'라는 개인주의적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다. 비오12세의 표현을 따른다면, 오늘날의 사랑의 덕은 '정치적 사랑' 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웃에게 취하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위한 우리의 현실참여가 곧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실존을 부합시키고 있느냐 않느냐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해방의 영성 / 영성이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복음을 생활에 옮기는 구체적인 방도이다. 영성은 만인들과 유대를 이루어 "주님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며, "주님을 모시고" 인간들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해방의 영성은 이웃을 향한 회심을 골자로 한다. 복음적 회심은 모든 영성의 시금석이며, 회심은 우리 자신의 철저한 변혁을 뜻한다. 회개한다는 것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의 해방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이다. 이 회개는 하나의 항속적 과정이다. 만약 회심하려고 하는 자는 우리네 사고방식과 결별해야 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고, 주님과 일치하는 방법도 달리해야 한다. 우리네 문화, 우리가 속한 사회계급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이웃을 향하는 회심, 사회정의와 역사를 향하는 회심만으로 할 바를 다했다고 하지 못한다. 거기에다가 사회적 투쟁과 노력의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평화를 찾아내는 방도를 강구하는 일이 더해져야 한다.
해방의 영성은 아나빔(야훼의 가난한 이들)의 영성을 기반으로 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해방의 영성의 진로는 신학적 사변보다도 생생한 체험으로 인하여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제 11 장, 종말론과 정치
인간의 현실참여는 장차 올 미래를 향하는 행위이다. 현대세계는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로 가득차 있다. 역사는 돌연 속도를 빨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발맞추어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새로운 인간을 출현시키려는 진지한 염원이 이 대륙에서 일고 있는 해방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메델린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우리는 바야흐로 이 대륙의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완전한 자유, 모든 형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개인적 성숙과 집단적 통합을 추구하는 열성이 충만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러한 표징들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려 는 첫 진통을 감지하는 것이다. -
후편 -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새로운 사회
많은 크리스챤들은 자기네가 어떻게 하면 시대의 뜻에 맞는 교회를 이룰 수 있는가에 고심하고 있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정치영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이제, 교회는 철저한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고, 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 크리스챤들의 견해이다.
교회는 이제 두가지의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 첫째, 교회의 존재의의와 세계에 대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둘째, 교회의 이 사명을 수행키 위한 일차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은 어떤 것인가.
이제 교회에게는 보다 새로운 교회의식과 세계안의 교회의 사명에 관한 재정의가 요구된다.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의 교회 :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의지를 무조건 긍정하게 됨으로써 세계안의 교회의 사명을 파악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교회의 존재목적이 "천국을 보장하는" 뜻에서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님을 지금은 누구나 알게 되었다. 구원사업은 역사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실재인 것이다.
이제 구티에즈의 교회론은 오로지 "구원사업과 교회의 활동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관 / 이제 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의 유일한 장으로 자처하기를 중단하고, 인간들에게 바치는 새롭고도 철두철미한 봉사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활동과 성령의 역사야말로 구원경륜의 혁신임을 새삼 각성할 필요가 있다. (과연 그럴까?)
4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으며, 교부들은 구원의 보편의지를 교의로 가르쳤고, 중세에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라고 단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중세에는 교회라는 울타리 밖에서도 진리의 편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무시되었다. 그러면서, 교회가 기존세력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만사를 자기본위로 생각하게 되었고, 공권력과 결탁하게 되었으며, 자기만이 구원의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내부에서부터 붕괴되면서 교회는 새로운 인간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 전반을 지나고, 금세기가 되면서, 2차바티칸 공의회는 구원의 보편의지를 전적으로 수긍하는 노선을 취하고, 교회본위의 사고방식에서 연역해 낸,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이론과 사목지침에 종지부를 찍었다.
성사와 표지 / 2차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성사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사의 개념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교회를 구원사업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또 교회본위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용어를 구사하여 교회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