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정치적 무관심의 원인
2. 시민정치 참여의 신학적 당위성
2. 시민정치 참여의 신학적 당위성
본문내용
ritique of Capitalism (NewYork: Orbis Book, 1986), p. 225. Duncan B. Forrester, "Ethics and Comminity by Enrique Dussel" (Review), Studies in Christian Ethis, vol. 3. No. 1 (1990), pp. 129-131. 역시 뒷셀의 유토피아적 요소의 헛점을 지적하면서도, '현실주의 윤리와 유토피안 윤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로 루벤 알브르를 인용한다: "유토피아를 상상하지 않을때, 윤리는 이미 주어진 질서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국한되고 만다" (출처 불명)
이런 자세가 올바른 현실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밀뱅크를 비롯한 공동체주의적 입장은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제의에만 머물기 쉽다는 점이다. 밀뱅크의 경우 그 요지는 합의된 공동선에 입각해서 모든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정하고 등가교환을 해야 한다. 덕 있는 사람에게 귀한 재화를 공적에 따라 분배해야 한다. 전적 계획 경제는 개인의 창조적 발전을 막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으나, 기본적인 사회 보장 제도를 관할하고 재정 공급을 감당하는 중앙기구가 필요하다.
). Milbank, Theology, pp. 244, 422.
이러한 원칙은 '두레마을' 같은 작은 공동체에서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소 공동체를 어떻게 전 사회를 포괄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가능하다고 해도 과연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전되어 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큰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 공동체 운동의 소중한 역할을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스톤의 주장대로, '현재 이미 존재하지만 좀 더 풍성하게 실현되기 위해 애쓰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예표로, 여러 다양한 기독교적 증거 중에 하나로' 간주되어야 함에 틀림없다.
). R. H. Preston, Church and Society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The Economic and Political Task (London: SCM Press, 1983), p. 141; Confusions in Christian Social Ethis : Problems for Geneva and Rome (London: SCM Press, 1994), pp. 146, 160, 169, 170.
그러나 광범위한 사회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달려있는 정치·경제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데도, 철저히 기독교적이지 못하다고 등한시하고 오직 소 공동체만 고집한다면 선의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빛'이 되는 사명을 유기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Richard H. Roberts, "Transcendental Sociology?: A Critigue of John Milbank's Theology and Social Theology Beyond Secular Reason," Scotish Journal of Theology, vol. 46 (1993), p. 534. 로버츠는 밀뱅크 입장의 약점을 한마디로 잘 요약해 준다: "그는 기독교의 근원적 담론(meta-discourse)를 포스트근대주의적으로 다시 복원시키고 그의 세속이성에 대한 승리를 주장함으로써, 세계의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제한한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이는 동면의 한 형태를 장려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종말론적인 정치적 불가능주의(impossibilism)를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커크는 균형 잡힌 제안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실천은 두 가지 헌신을 포괄한다.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를 창조해 나가는 헌신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이 세상의 재화의 사적 소유자가 더 이상 복음의 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복음과 인간의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함으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실이 이 공동체에서는 일체 사라져야 한다. 두번째는 착취당하는 자를 위해 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열려 있고, 예언자적이고, 끊임없이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성서적 고찰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고찰은 교회가 처해 있는 그 현장 속에서 자신을 갱신하도록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J. Andrew Kirk, Liberation Theology: An Evangelical view from the Third World (Basingstoke: Marshall Morgan & scott, 1979/85), p. 201.
맺음말
시민정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제 시민사회의 공간은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마 11: 12). 그런데 이 열린 공간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인은 이중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우선 그 공간은 그냥 열린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그렇게 고귀한 공간을 사용하지 않고 내 팽개쳐 버린다면 그들에 대한 모독이요 배은 망덕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피가 호소할 것이다. 둘째로는 주님이 맡기신 중대하고 고귀한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발목을 묶어 놓았던 족쇄를 과감히 벗어 버려야 한다. 이원론적인 사고, 그릇된 정·교 분리 사상, 자의적인 성경해석, 그리고 기득권에 집착하는 집단 이기주의 요소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예수님, 인간, 구원, 그리고 교회의 진정한 의미들을 되새겨야겠다. 이 신학적 진리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시민정치에로 강력히 초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초대의 음성이 또 다른 곳에서 들려 오는 것만 같다. 그 곳은 레비나스가 말한 작은 자들의 '얼굴'이다.
) 엠누엘 레비나스 지음·강영안 옮김, 「시간과 타자」(서울, 문예출판사, 1997), 134-141 쪽.
그 얼굴 속에 담겨진 무력함과 절망 속에서 우레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는 언제 까지 자려느냐? 깨어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
이런 자세가 올바른 현실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밀뱅크를 비롯한 공동체주의적 입장은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제의에만 머물기 쉽다는 점이다. 밀뱅크의 경우 그 요지는 합의된 공동선에 입각해서 모든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정하고 등가교환을 해야 한다. 덕 있는 사람에게 귀한 재화를 공적에 따라 분배해야 한다. 전적 계획 경제는 개인의 창조적 발전을 막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으나, 기본적인 사회 보장 제도를 관할하고 재정 공급을 감당하는 중앙기구가 필요하다.
). Milbank, Theology, pp. 244, 422.
이러한 원칙은 '두레마을' 같은 작은 공동체에서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소 공동체를 어떻게 전 사회를 포괄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가능하다고 해도 과연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전되어 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큰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 공동체 운동의 소중한 역할을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스톤의 주장대로, '현재 이미 존재하지만 좀 더 풍성하게 실현되기 위해 애쓰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예표로, 여러 다양한 기독교적 증거 중에 하나로' 간주되어야 함에 틀림없다.
). R. H. Preston, Church and Society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The Economic and Political Task (London: SCM Press, 1983), p. 141; Confusions in Christian Social Ethis : Problems for Geneva and Rome (London: SCM Press, 1994), pp. 146, 160, 169, 170.
그러나 광범위한 사회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달려있는 정치·경제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데도, 철저히 기독교적이지 못하다고 등한시하고 오직 소 공동체만 고집한다면 선의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빛'이 되는 사명을 유기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Richard H. Roberts, "Transcendental Sociology?: A Critigue of John Milbank's Theology and Social Theology Beyond Secular Reason," Scotish Journal of Theology, vol. 46 (1993), p. 534. 로버츠는 밀뱅크 입장의 약점을 한마디로 잘 요약해 준다: "그는 기독교의 근원적 담론(meta-discourse)를 포스트근대주의적으로 다시 복원시키고 그의 세속이성에 대한 승리를 주장함으로써, 세계의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제한한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이는 동면의 한 형태를 장려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종말론적인 정치적 불가능주의(impossibilism)를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커크는 균형 잡힌 제안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실천은 두 가지 헌신을 포괄한다.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를 창조해 나가는 헌신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이 세상의 재화의 사적 소유자가 더 이상 복음의 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복음과 인간의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함으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실이 이 공동체에서는 일체 사라져야 한다. 두번째는 착취당하는 자를 위해 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열려 있고, 예언자적이고, 끊임없이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성서적 고찰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고찰은 교회가 처해 있는 그 현장 속에서 자신을 갱신하도록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J. Andrew Kirk, Liberation Theology: An Evangelical view from the Third World (Basingstoke: Marshall Morgan & scott, 1979/85), p. 201.
맺음말
시민정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제 시민사회의 공간은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마 11: 12). 그런데 이 열린 공간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인은 이중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우선 그 공간은 그냥 열린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그렇게 고귀한 공간을 사용하지 않고 내 팽개쳐 버린다면 그들에 대한 모독이요 배은 망덕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피가 호소할 것이다. 둘째로는 주님이 맡기신 중대하고 고귀한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발목을 묶어 놓았던 족쇄를 과감히 벗어 버려야 한다. 이원론적인 사고, 그릇된 정·교 분리 사상, 자의적인 성경해석, 그리고 기득권에 집착하는 집단 이기주의 요소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예수님, 인간, 구원, 그리고 교회의 진정한 의미들을 되새겨야겠다. 이 신학적 진리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시민정치에로 강력히 초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초대의 음성이 또 다른 곳에서 들려 오는 것만 같다. 그 곳은 레비나스가 말한 작은 자들의 '얼굴'이다.
) 엠누엘 레비나스 지음·강영안 옮김, 「시간과 타자」(서울, 문예출판사, 1997), 134-141 쪽.
그 얼굴 속에 담겨진 무력함과 절망 속에서 우레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는 언제 까지 자려느냐? 깨어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