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의 식생과 생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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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 론

본 론
1. 식용식물
2. 수 렵
3. 어로

농경생활의 영위
1. 논농사와 밭농사
2. 수전의 입지와 구조
3. 경작
4. 수확·탈곡

식생활
1. 조리법
2. 먹는법

결 론

본문내용

종종 눈에 띠는데, 대개 뚜껑을 닫고 요리하여야하는 쌀의 경우에 흔적이 남는 경우가 많고 죽이나 국인 경우는 대부분 수증기만 배출되고 내용물이 있더라도 끓자마자 뚜껑을 열어놓아도 되므로 거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따라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밥을 만들기 위한 토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국이나 죽에 이용된 토기로 판단하고 있다. 일본의 岡山縣 百間川遺蹟에서 출토된 토기의 외부 혹은 내부에 탄착된 탄화물의 종류를 분석한 결과, 밥 요리시에 쌀만으로 이루어진 요리가 50%, 쌀과 잡곡이 혼합된 요리가 20%, 기타가 30% 정도의 비율로 나타나고 있어 주식으로서 쌀의 이용율은 전체의 50%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취사장소는 공동취사와 개별 취사의 가능성이 상정되는데 노지와 부뚜막이 존재하는 주거지는 개별취사의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송국리유형의 경우는 노지가 없고 공동취사시설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파악하기가 매우 곤란하나 다른 수혈계 주거지와는 달리 특별한 퇴적상태를 보이므로 노지가 남기 어려운 상면구조의 가능성이 상정된다.
한편 철시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시루는 알려진 것처럼 쌀이나 기타 음식물을 쪄서 먹는 도구임에는 틀림없으나 출토비로 보아 사용 빈도수는 그다지 높지 않았던 듯 싶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제사 등과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떡 등의 음식을 만들기 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쌀이나 기타곡물의 조리는 쪄서 먹었던 것이 아니라 죽이나 밥의 형태였을 것이다.
결국, 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견과류(도토리 등)가 주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였음에는 틀림없으나 필요한 만큼 충분히 확보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잡곡과의 혼식이 생기게되고 따라서 잡곡과 채소류도 주식으로서 점차 자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선사시대 이래의 조리로는 날 것을 그대로 먹는 방식, 굽는 방식(적炙)과 찌는 방식(자煮)-고기류, 끓이는 방식과 죽(주식류), 띄우는 방식(술 등 발효식품), 조미료(소금) 등이 있을 것이고, 삼국시대가 되면 한층 발달하여 주식인 쌀 외에 기름, 꿀, 장, 메주, 젓갈 등의 보조식품이 나타나고 이를 이용한 김치도 정착되어 간다.
2. 먹는법
선사.고대의 쌀이 당시 인간들의 식생활에서 차지한 비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대미가 단위면적당 어느정도 수확이 가능하였으며 이것이 전체 섭취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인지를 검토하는 것이 우선 과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취락과 주변 수전유적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한 집단의 전채적인 면모가 드러나야만 계산가능할 것이나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 이러한 검토례가 없어 일본의 登呂유적에 대한 분석결과를 기반으로 관창리유적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고대에 수전 1평당 수확가능한 양은 현미로 약 5합 정도이며, 쌀만 먹었다고 가정하였을 경우 1인당 하루에 필요한 현미의 양은 약 3합 정도로 보고 있다. 1합은 현재의 중량으로 계산했을 때, 약 143g 정도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필요한 양은 430g이 되고 1년이면 157kg에 이른다. 登呂유적의 조사에서 동일시기의 주거인원은 총 60인 정도로, 1년이면 65,700합(9,400kg)이 소비된다. 登呂유적의 수전면적은 대략 2만여평으로, 100,000합(14,300kg) 정도의 수확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분석한 乙益重隆氏는 마을에서 소비하고 남는 최소한 30,000합 이상은 다음해의 종자나 비축물자 혹은 교환물자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유적에서 이와 같은 여분이 계상되지는 않고 대개는 자체 수요의 50% 수준에 머물렀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를 관창리유적에 적용해 보면, 곡부의 가용가능한 수전면적은 약 7,000평, 산출량으로는 35,000합(5,000kg)이 계상된다. 동시기의 주거지는 약 20기 정도로 주거당 평균인원을 3.5인으로 보았을 때, 전체구성원은 70인, 이들이 1년 내내 쌀만 먹었다고 가정할 경우, 필요로 하는 양은 약 76,000여합(약11,000kg)이 되어, 전체소비량의 절반정도가 쌀로서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쌀이 주식으로서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여 식생활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이와 관련해서 먹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미미한 형편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인이 식사를 할 때, 俎豆(조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俎가 소반형태의 상을 일컫고, 豆는 나무로 만든 고배를 의미하고 있음을 본다면 목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匙箸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한편, 왜인전에도 '음식을 먹을 때는 豆를 사용하여 손으로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은 대나무로 만든 고배를 뚱하고 豆는 나무로 만든 고배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식용기로서 목기사용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만 식사도구인 匙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자비용토기에 남아있는 조리흔적으로 보아 주로 쌀로서 죽이나 밥을 지어먹거나 기타 스프류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어떠한 형태로든가의 식사도구는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다. 무문토기유적에서 주전자형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더라도 식생활에 실제 사용된 도구는 매우 다양하였을 것이다. 단지 이들이 목제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저습지에 대한 조사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최근 조사된 일본 岡山市 南유적에서는 彌生中期에 해당하는 목제 포크가 발견되었다. 실제 식사시 사용된 것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식생활에 여러 형태의 도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결 론*
고대의 생업에 대한 연구는 대상은 비록 방대하지만 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연구대상에서 도외시되어져 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차츰 활기를 띠면서 앞으로 고고자료의 중가여부에 따라 괄목할만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너무 방대한 분야를 한꺼번에 다루다보니 구체적인 중거를 제시하거나 제대로 논증하지도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고를 통하여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풀어나갈 생각이다. 이점 양해를 구하며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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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3.10.25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8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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