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개관
정치
사회·경제
문화·사상
미술
고려와의 관계
정치
사회·경제
문화·사상
미술
고려와의 관계
본문내용
몽골제국에 멸망한 금(金)나라에 딸려 있던 거란(契丹)의 유민들이 고려에 침입하여 이후 3년 동안 충청·전라·경상도 등 남부지방을 제외한 북방지역을 유린하였다. 이에 칭기즈칸은 ‘거란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고 성명하고 몽골과 동진국(東鎭國)의 연합군을 파군하여 함경도 지방에 걸쳐 있던 거란군의 거점을 차례로 부수고 거란의 주력이 웅거한 강동성(江東城)으로 향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도 군량미를 보내어 지원하고 고려군도 합세하여 강동성에 남아 있던 거란의 마지막 세력을 평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19년(고종 6) 개경(開京)에 사신을 보내 칭기즈칸의 조서(詔書)를 전하고 정식으로 수호(修好)를 청하였는데 이것이 몽골과의 정식 국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의 토멸이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 양 해마다 상례로 과중한 공물(貢物)을 받아갔으며, 25년에는 공물을 요구하러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골의 사신이 국경지대에서 암살된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몽골은 이를 빙자하여 고려 정벌을 단행하였다. 31년(고종 18) 제1차 고려침략을 시작한 이래, 몽골은 제2차(32), 제3차(35∼38), 제4차(51), 제5차(54), 제6차(55), 제7차(57)의 침략군을 보내 고려를 유린하였다. 제1차 몽골의 침략을 받은 이듬해인 32년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쟁태세를 갖추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조건인 국왕의 입조(入朝)와 강화도로부터의 출륙(出陸)을 들어주는 듯이 화의를 하여 철군하게 하였으나 끝내 이를 실행하지 않고 28년간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고래로 중국 역대강대국과 외교상 부득이 사대주의를 취하여 온 것은 사실이나 국왕이 친조(親朝)한 예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7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인명·재산·문화재 등의 피해로 국토는 초토가 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마침 1258년 무신정권의 최종 집권자인 최의(崔?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강화(講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59년(고종 46) 고려는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k:元宗) 등 40여 명을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들을 헐어버림으로써 고려는 28년의 항쟁 끝에 몽골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몽골에의 입조를 않고 강화도의 궁성이 헐린 6월에 죽었으며, 이듬해 인질로 갔던 태자가 귀국해서 즉위하여 원종이 되었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에 태자 심(諶:忠烈王)을 몽골에 인질로 보내어 이로부터 고려의 왕태자는 국내의 왕이 죽어 이를 계승하게 될 때까지 몽골에 머무는 것이 상례가 되었고, 원종 자신도 64년 몽골의 요구에 따라 연경(燕京:北京)에 가서 쿠빌라이칸에게 알현함으로써 최초로 중국황제에게 친조한 왕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원종은 개경에 새로 짓는 궁궐의 핑계를 대고 강화도에서 출륙을 않다가 70년에야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이를 전후해서 무신(武臣)들을 중심으로 한 반원(反元) 세력은 한때 원종을 폐위하고, 동조세력인 삼별초군(三別抄軍)은 대원(對元)항쟁을 74년까지 계속하는 등 오랫동안 고려의 일각에서는 원나라에 강한 적대의사를 보였다. 고려는 원종 이후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및 공민왕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유례 없는 간섭을 받아 자주성을 잃게 되었고 왕실은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됨으로써 왕통은 혼혈화하였으며, 중앙의 정치제도는 그들의 강압에 의하여 수시로 개변(改變)하였다. 또한 함경도의 서북면에는 그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평양에는 동녕부(東寧府)를 두어 황해도의 자비령(慈悲嶺)을 두 나라의 국경을 삼는 등 국토도 유린하였다. 더구나 원나라는 1274년(원종 15)과 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강압하여 일본을 정벌하려다 실패함으로써 고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원나라가 쇠퇴할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고려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몽골 머리를 고치고, 원나라 순제 황후의 오빠로서 고려에서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을 죽이는 한편, 동북면에 군사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몰아냄으로써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등 점차 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났다. 몽골지배하의 약 1세기 동안 문화적으로는 문물과 인물의 교류가 잦아 복식(服飾)을 비롯한 생활양식 등에 몽골풍의 유행을 일으키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여 그 유풍은 조선 초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방문화와의 교류에 힘쓴 원나라의 영향으로 천문·역법(曆法)·의학·수학 등이 전래되었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의 토멸이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 양 해마다 상례로 과중한 공물(貢物)을 받아갔으며, 25년에는 공물을 요구하러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골의 사신이 국경지대에서 암살된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몽골은 이를 빙자하여 고려 정벌을 단행하였다. 31년(고종 18) 제1차 고려침략을 시작한 이래, 몽골은 제2차(32), 제3차(35∼38), 제4차(51), 제5차(54), 제6차(55), 제7차(57)의 침략군을 보내 고려를 유린하였다. 제1차 몽골의 침략을 받은 이듬해인 32년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쟁태세를 갖추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조건인 국왕의 입조(入朝)와 강화도로부터의 출륙(出陸)을 들어주는 듯이 화의를 하여 철군하게 하였으나 끝내 이를 실행하지 않고 28년간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고래로 중국 역대강대국과 외교상 부득이 사대주의를 취하여 온 것은 사실이나 국왕이 친조(親朝)한 예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7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인명·재산·문화재 등의 피해로 국토는 초토가 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마침 1258년 무신정권의 최종 집권자인 최의(崔?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강화(講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59년(고종 46) 고려는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k:元宗) 등 40여 명을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들을 헐어버림으로써 고려는 28년의 항쟁 끝에 몽골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몽골에의 입조를 않고 강화도의 궁성이 헐린 6월에 죽었으며, 이듬해 인질로 갔던 태자가 귀국해서 즉위하여 원종이 되었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에 태자 심(諶:忠烈王)을 몽골에 인질로 보내어 이로부터 고려의 왕태자는 국내의 왕이 죽어 이를 계승하게 될 때까지 몽골에 머무는 것이 상례가 되었고, 원종 자신도 64년 몽골의 요구에 따라 연경(燕京:北京)에 가서 쿠빌라이칸에게 알현함으로써 최초로 중국황제에게 친조한 왕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원종은 개경에 새로 짓는 궁궐의 핑계를 대고 강화도에서 출륙을 않다가 70년에야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이를 전후해서 무신(武臣)들을 중심으로 한 반원(反元) 세력은 한때 원종을 폐위하고, 동조세력인 삼별초군(三別抄軍)은 대원(對元)항쟁을 74년까지 계속하는 등 오랫동안 고려의 일각에서는 원나라에 강한 적대의사를 보였다. 고려는 원종 이후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및 공민왕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유례 없는 간섭을 받아 자주성을 잃게 되었고 왕실은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됨으로써 왕통은 혼혈화하였으며, 중앙의 정치제도는 그들의 강압에 의하여 수시로 개변(改變)하였다. 또한 함경도의 서북면에는 그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평양에는 동녕부(東寧府)를 두어 황해도의 자비령(慈悲嶺)을 두 나라의 국경을 삼는 등 국토도 유린하였다. 더구나 원나라는 1274년(원종 15)과 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강압하여 일본을 정벌하려다 실패함으로써 고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원나라가 쇠퇴할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고려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몽골 머리를 고치고, 원나라 순제 황후의 오빠로서 고려에서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을 죽이는 한편, 동북면에 군사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몰아냄으로써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등 점차 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났다. 몽골지배하의 약 1세기 동안 문화적으로는 문물과 인물의 교류가 잦아 복식(服飾)을 비롯한 생활양식 등에 몽골풍의 유행을 일으키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여 그 유풍은 조선 초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방문화와의 교류에 힘쓴 원나라의 영향으로 천문·역법(曆法)·의학·수학 등이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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