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 론
-선종에 대한 탐구
□ 본 론
★ 지방호족의 대두
★ 선종의 유입
★ 호족과 선종의 융합
★ 선종과 호족의 결탁이 사회에 끼친 영향
□ 결 론
-선종에 대한 탐구
□ 본 론
★ 지방호족의 대두
★ 선종의 유입
★ 호족과 선종의 융합
★ 선종과 호족의 결탁이 사회에 끼친 영향
□ 결 론
본문내용
리고 임제종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황룡파와 양기파를 일컫는 오가칠종으로 정착되었다. 이 가운데 위앙종은 비교적 일찍 쇠망 하였고, 후대까지 오래 법맥을 유지한 것은 임제종과 조동종이었다.
★ 선종의 유입
선종이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이미 7세기 선덕여왕 대였다. 법랑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중국선종의 제4조인 도신에게 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후 법랑의 제자 신행이 법랑의 입적 후에 당나라로 가서 북종선의 신수를 이은 지공에게 법을 배웠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렇다 할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9세기 초 헌덕왕 대에 도의가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 지장에게 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가지산파를 열면서 선종이 점차 널리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홍척의 실상산파, 혜철의 동리산파, 현욱의 봉림산파, 도윤의 사자산파, 범일의 사굴산파 무염의 성주산파, 등 소위 선문구산(先文九山)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구산문 외에도 양산헤적의 법을 전해와 오관산에 용엄사를 개창한 순지를 비롯하여 많은 선승이 나말여초에 중국 선종의 각 선풍을 배워 산문을 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왜 유독 구산문이 자주 거론되는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상충하고 있다. 뚜렷한 정설은 아직 없지만, 지금까지의 통설에 따르면 구산문과 개산조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즉 중국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법을 전수받고 사자상승의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각 구산문의 개산조로 높였으며, 반면 그 이후 국내에서 이미 선을 수련한 뒤에 중국에서 다시 법을 전해받고 새로운 종풍으로 산문을 연 선승은 독립적인 산문의 개산조가 아니라 선사의 산문에 소속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지에 따라 법계를 정리하는 중국의 계통 분류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주로 나말여초에 성립한 한국 선종의 고유한 특성이 구산문의 관념 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 하겠다.
★ 호족과 선종의 융합
나말여초에 선종이 이처럼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지방호족에게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종 9산은 대부분 호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가령 봉림산파는 김해의 호족의 김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사굴산파는 명주의 호족인 왕순식의 후원을 받았으며, 수미산파는 송악의 호족인 왕건과 관계가 깊었다. 또 9산을 처음 연
승려들도 호족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비록 그 선조가 중앙귀족인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이미 낙향하여 호족화한 인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선종 9산은 모두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선종은 사상적으로도 귀족중심의 교학불교가 가지고 있던 사변적인 교리 논쟁을 비판하면서 깨달음의 직접적인 길을 제시함으로써 매우 강력한 실천 강령을 제시해 주었다. 가령 마조 도일은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자신의 생각을 비춰 꺼달으면 모든 활동이 곧 불법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旨人心 見性成佛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선종은 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 것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곧 불성임을 알면 그것이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견성오도의 방법이었다. 선을 통해 각자이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종을 교종에 비해 개인 수행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무장층과 지방분권적인 호족의 성향에 잘 들어 맞는다고 할 수 있다.
★ 선종과 호족의 결탁이 사회에 끼친 영향
물론 중국의 여러 선종 가운데서도 마조 도일 계통의 홍주종은 일심을 비추어봄으로써 모든 실천 행위가 불법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원리면에서는 교종이 화엄종의 법계연기사상고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잇다. 그렇지만 마조선은 화엄이 복잡한 교리체계를 구성하고 불, 보살, 천신에 대한 신앙 의례를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철저한 청정수행을 강조하였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은 구산문 가운데 여덟 산문의 개산조가 모두 국내에서 화엄을 공부한 연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마조 문하에서 법을 받았으며, 돌아와서는 신라의 지배적 불교였던 화엄불교를 비판하는 선봉장이 되었던 점, 그리고 그들이 지방호족의 비호를 받게 된 점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종은 나말여초의 상황에서 지방호족의 종교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선종이 가지고 있던 개인중심의 분권 경향과 사변 경론보다는 실천 수행을 중시하는 경향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에 반항하여 일어났던 호족에게 이념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진골귀족 사이의 왕위 쟁탈전과 지방호족의 세력 다툼, 그리고 각종 농민 반란이 수업이 일어나 삶이 불안해지자 불교의 대중화과정에서 피지배층까지 확산된 미타, 미륵신앙 등 정토신앙과 밀교신앙이 지방사회의 토착세력과 농민, 천민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미륵 하생신앙은 새 시대의 대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변혁이념으로 작용하여, 많은 반란지도자가 미륵불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나말여초에 일어난 주도적인 변화는 역시 지방분권에서 성장한 지방호족의 득세와 이에 편승한 선종의 확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 론
'나도 깨달으면 부처'
본편적 개체로서의 인가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종의 번창이 그 당시 사회를 크게 흔든 것으로 보인다. 호족 출신들이 기초적인 문인적 소양을 갖추어 갖고, 새로운 사조에 따른 인간관도 확산되면서 혈통별 신분 차이를 극도로 강조하는 골품제에 입각한 인간관이 붕괴함에 따라, 신라가 망하고 왕건의 고려가 탄생한 것 같다.
호족과 결탁 후 하나의 종파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던 선종. 단순히 종교로서의 한 길이 아니라, 사회를 뒤바꾼 하나의 '종교혁명'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문헌 :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 』 (이론과 실천)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청년사)
『선종이야기』 (홍희)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나말여초 선종의 사회적 성격』(사학연구)
『나말 선승들과 사회제세력과의 관계』(사총)
★ 선종의 유입
선종이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이미 7세기 선덕여왕 대였다. 법랑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중국선종의 제4조인 도신에게 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후 법랑의 제자 신행이 법랑의 입적 후에 당나라로 가서 북종선의 신수를 이은 지공에게 법을 배웠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렇다 할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9세기 초 헌덕왕 대에 도의가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 지장에게 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가지산파를 열면서 선종이 점차 널리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홍척의 실상산파, 혜철의 동리산파, 현욱의 봉림산파, 도윤의 사자산파, 범일의 사굴산파 무염의 성주산파, 등 소위 선문구산(先文九山)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구산문 외에도 양산헤적의 법을 전해와 오관산에 용엄사를 개창한 순지를 비롯하여 많은 선승이 나말여초에 중국 선종의 각 선풍을 배워 산문을 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왜 유독 구산문이 자주 거론되는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상충하고 있다. 뚜렷한 정설은 아직 없지만, 지금까지의 통설에 따르면 구산문과 개산조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즉 중국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법을 전수받고 사자상승의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각 구산문의 개산조로 높였으며, 반면 그 이후 국내에서 이미 선을 수련한 뒤에 중국에서 다시 법을 전해받고 새로운 종풍으로 산문을 연 선승은 독립적인 산문의 개산조가 아니라 선사의 산문에 소속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지에 따라 법계를 정리하는 중국의 계통 분류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주로 나말여초에 성립한 한국 선종의 고유한 특성이 구산문의 관념 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 하겠다.
★ 호족과 선종의 융합
나말여초에 선종이 이처럼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지방호족에게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종 9산은 대부분 호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가령 봉림산파는 김해의 호족의 김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사굴산파는 명주의 호족인 왕순식의 후원을 받았으며, 수미산파는 송악의 호족인 왕건과 관계가 깊었다. 또 9산을 처음 연
승려들도 호족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비록 그 선조가 중앙귀족인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이미 낙향하여 호족화한 인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선종 9산은 모두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선종은 사상적으로도 귀족중심의 교학불교가 가지고 있던 사변적인 교리 논쟁을 비판하면서 깨달음의 직접적인 길을 제시함으로써 매우 강력한 실천 강령을 제시해 주었다. 가령 마조 도일은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자신의 생각을 비춰 꺼달으면 모든 활동이 곧 불법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旨人心 見性成佛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선종은 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 것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곧 불성임을 알면 그것이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견성오도의 방법이었다. 선을 통해 각자이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종을 교종에 비해 개인 수행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무장층과 지방분권적인 호족의 성향에 잘 들어 맞는다고 할 수 있다.
★ 선종과 호족의 결탁이 사회에 끼친 영향
물론 중국의 여러 선종 가운데서도 마조 도일 계통의 홍주종은 일심을 비추어봄으로써 모든 실천 행위가 불법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원리면에서는 교종이 화엄종의 법계연기사상고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잇다. 그렇지만 마조선은 화엄이 복잡한 교리체계를 구성하고 불, 보살, 천신에 대한 신앙 의례를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철저한 청정수행을 강조하였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은 구산문 가운데 여덟 산문의 개산조가 모두 국내에서 화엄을 공부한 연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마조 문하에서 법을 받았으며, 돌아와서는 신라의 지배적 불교였던 화엄불교를 비판하는 선봉장이 되었던 점, 그리고 그들이 지방호족의 비호를 받게 된 점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종은 나말여초의 상황에서 지방호족의 종교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선종이 가지고 있던 개인중심의 분권 경향과 사변 경론보다는 실천 수행을 중시하는 경향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에 반항하여 일어났던 호족에게 이념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진골귀족 사이의 왕위 쟁탈전과 지방호족의 세력 다툼, 그리고 각종 농민 반란이 수업이 일어나 삶이 불안해지자 불교의 대중화과정에서 피지배층까지 확산된 미타, 미륵신앙 등 정토신앙과 밀교신앙이 지방사회의 토착세력과 농민, 천민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미륵 하생신앙은 새 시대의 대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변혁이념으로 작용하여, 많은 반란지도자가 미륵불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나말여초에 일어난 주도적인 변화는 역시 지방분권에서 성장한 지방호족의 득세와 이에 편승한 선종의 확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 론
'나도 깨달으면 부처'
본편적 개체로서의 인가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종의 번창이 그 당시 사회를 크게 흔든 것으로 보인다. 호족 출신들이 기초적인 문인적 소양을 갖추어 갖고, 새로운 사조에 따른 인간관도 확산되면서 혈통별 신분 차이를 극도로 강조하는 골품제에 입각한 인간관이 붕괴함에 따라, 신라가 망하고 왕건의 고려가 탄생한 것 같다.
호족과 결탁 후 하나의 종파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던 선종. 단순히 종교로서의 한 길이 아니라, 사회를 뒤바꾼 하나의 '종교혁명'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문헌 :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 』 (이론과 실천)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청년사)
『선종이야기』 (홍희)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나말여초 선종의 사회적 성격』(사학연구)
『나말 선승들과 사회제세력과의 관계』(사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