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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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눌과 불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 고려후기 불교계 정세와 글의 방향

2. 지눌의 생애

3. 결사운동의 배경

4. 결사운동의 이론의 전개

5.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6. 맺음말
- 결사운동의 결과와 의의

본문내용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장악하였으며, 나아가 조씨 가문은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천태종 교권까지도 좌우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원지배기의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자각·반성운동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 계승되지 못하고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신앙결사가 우리 역사상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존속한 시기는 13세기 전후에 걸친 몇십 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수선사 계통의 지눌·혜심과 백련사 계통의 요세·천인·천책 등이었다. 12세기 이래로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 일반 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가던 잠재적인 저력이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6.맺음말
13세기 전후에 실천적인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결사를 주도한 몇몇 명승(名僧)의 노력도 중시해야겠지만 이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의 변화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3세기의 고려사회가 처해 있던 대내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아울러 30여 년 간에 걸친 이민족과의 항전을 치러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인 지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느 한쪽에만 경도되기 쉬운 현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 사상이든 출가인들의 본분이지만,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양자는 관념적인 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수레의 양바퀴처럼 함께 하면서 실천의 장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결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결사를 운동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다 보면 철학면(교리면)의 발전은 경시하기 쉬운데,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13세기 전반에 수선사가 간행한 선적(禪籍)을 보면 단순히 중국의 저술을 다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종합·정리한 것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백련사도 천태·법화계통의 불서를 절요(節要)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철학을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결사 단계에 구축한 이러한 철학면의 발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철학의 자기화(自己化)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또한 13세기에 몽고와의 항전을 치르면서도 대장경을 주조한 사상적인 맥락과도 통하는 것이다. 당시 대장경 주조는 다각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면에서 일정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대체로 결사운동이란 사회적 불안요소를 통해 형성되고 있음이 일반적이다. 결사의 시초라 할 동보시대의 백연사도 물론이고, 영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고려후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수선사의 결사운동도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돈을 거듭한 명종대가 그 원인이 되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지러운 사회의 일각에는 시대적 고민을 성찰하고 헤쳐 나가려는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진전하려는 몸부림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눌의 수선사보다 선행된 수정사 등의 결사를 본격적 결사의 형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인과 자신이 공동으로 해탈을 찾으려는 것이나, 학불자가 자포자기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나, 중생의 복된 토지가 되어줄 터를 찾아 나서는 것 등이 모두 남과 자신의 구제에 의의가 있는 것이기는 하나 구체적 실천방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적어도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정화의 일선에서 기념비적 성격을 띤 것은 지눌의 정혜쌍수에 있다고 본다. 그의 이 논리는 인간의 평상심이 부처의 마음과 같다는 기저에 논리의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깨끗하면 부처의 나라가 깨끗하다는 것이다. 모든 염원을 갖고 있는 중생들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논리는 타락한 당시의 불교계에 일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교·선의 파쟁도 이 논리 앞에서는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
관저에는 수많은 도량이 행해지고, 아울러 반승도 행해져 재정의 곤란이 뒤따랐다. 이런 기복적·도식적인 불사는 민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각종 제의나 행사에 경전을 이용해야 했다.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더욱 화려하고 성대할 필요가 있었으며 더욱 기만적인 행위가 속출되어 타락화된 모습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바로 지눌의 시대적 사명이 발동한 것이고 정혜쌍수를 통한 불교 정화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나 유교에서 높은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결사에 뜻을 같이할 사람은 앞서 관련이 있든 없든 모두 결사에 참여시키려는 것은 정혜쌍수를 밑바탕으로 한 사상 때문이기도 하며, 그만큼 자신의 이론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눌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정혜쌍수와 결사운동이 한국 사상사에서 지눌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하겠다.
<<참고 문헌>>
1. 진성규 1984 <고려후기수선사의 결사운동> <<한국학보 36>> 서울일지사
2. http://guilbut.netian.com/koryu.html
3. 박용운 1988 <<고려시대사 上>> 서울 일지사
4. http://budreview.com/html/4/4-special-1-kim-5.htm
5. http://zen.buddhism.org/kr/master/jinu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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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30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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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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